의미와 책임-복잡한 세상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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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 흔한 절망은 단순히 의미의 부재를 넘어선다. 그것은 과거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현대인만의 고유한 딜레마를 품고 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고통은 명확한 해석틀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농민이 기근으로 굶주릴 때, 그것은 '신의 시련'이었다. 조선시대 선비가 과거에 낙방했을 때, 그것은 '하늘이 내린 시련'이자 '인격 수양의 기회'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고문을 당할 때, 그것은 '조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이러한 의미 체계는 개인의 고통을 더 큰 서사 속에 위치시켜 견딜 수 있게 만들었고, 공동체 전체를 결속시키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과학적 사고방식의 확산과 함께 이런 전통적 의미 체계들이 하나둘 해체되기 시작했다. 뇌과학은 우리에게 사랑도 도파민의 작용이라고 말하고, 사회학은 개인의 성공도 계층과 자본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고통은 그냥 생물학적·사회적 현상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의미는 허상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할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과연 현대인의 고통이 정말 '의미의 부재' 때문일까? 의미가 사라져서 우리가 괴로운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 철학은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여 '의미 창조'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실존주의자들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했고,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했다. 카뮈는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왜 굳이 우리가 의미라는 것을 창조해야 하는가? "의미를 창조하자"는 말도 어떻게 보면 또 다른 당위론이다. 마치 "살아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처럼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것인데, 정작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물으면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의미는 허상이다 vs 의미는 실재한다"라는 이분법적 접근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어떤 기능을 하느냐일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처럼, 어떤 것이 '허상'이라 해도 실제 효과가 있다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의미 부여가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마치 새가 날려고 하고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인간은 그냥 의미를 찾고 만드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 이제 의미를 만들어보자!"가 아니라, 그냥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뭔가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관계를 맺고, 패턴을 찾는다.

만약 이것이 본능이라면, 현대인들이 겪는 '의미 없음'의 고통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새를 좁은 새장에 가두면 날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인간도 의미를 만들고 찾는 본능이 막히면 괴로워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동물들은 본능을 의심하지 않는데 인간만 "이게 왜 본능이지? 이 본능이 맞나?"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창조자의 윤리 문제와 흡사한 구조를 갖는다. 창조자는 "왜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특히 고통이 따르는 존재를 만들어놓고는 어떤 이유를 대도 "그런데 왜 굳이?"라는 질문이 뒤따라온다. 그냥 창조 욕구가 있어서? 외로워서? 사랑해서? 모든 답은 다시 "왜?"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인간이 의미를 창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작은 창조자가 된다. 그리고 그 의미에 따라 살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때로는 그 의미 때문에 더 고통받기도 한다. 더 기묘한 것은 창조자가 창조한 존재가 다시 창조자가 되어서 또 다른 것들(의미, 가치, 관계)을 창조하는 끝없는 연쇄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은 신이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왜 창조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기가 왜 의미를 만드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계속 만들어간다.


현대인의 진짜 고통은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지기 싫어서일 수 있다.

생각해보자. 의미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이 중요하다"고 선언하는 행위다. 연인과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나는 그 관계를 지켜나갈 책임을 진다. 직업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나는 그 일을 잘해낼 의무를 갖는다. 꿈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실현해야 할 부담을 안는다. 의미 부여는 곧 책임 부여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전략이 있다. 바로 책임 회피다. "난 선택한 적 없어, 그냥 태어났을 뿐이야." "헬조선이 문제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어차피 금수저가 아니면 안 되는 세상인데." "의미? 그런 거 없어. 다 착각이야."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며 능동적 선택을 회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책임을 회피한 사람들이 동시에 "내 삶에 의미가 없다"며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의미를 거부했으면서도 의미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 현대인이 직면한 핵심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우리의 고통은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면 책임져야 하는데, 그게 무서워서 의미 만들기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의미 없는 삶은 견디기 힘들어서" 발생하는 딜레마인 것이다. 의미를 만들자니 부담스럽고, 안 만들자니 공허하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모순이 드러난다. 우리가 "책임을 지기 싫어하게 된 것" 자체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마치 "게으름을 선택했으니 게으른 결과를 책임져라"라고 하는데, 정작 그 게으름 자체는 선택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책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디서부터가 "내가 선택한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냥 그렇게 된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의미를 만들고 싶어하는 존재"가 된 것도 우리 선택이 아니고, "책임을 무서워하는 존재"가 된 것도 우리 선택이 아니다.

이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이 된다. 마치 누군가 악취미로 이런 시스템을 설계한 것 같다. "너희들한테 의미를 갈구하는 본능을 줄 테니까, 그런데 의미를 만들면 책임져야 해. 책임지기는 무서우니까 의미 만들기를 회피하게 만들 테고, 그러면 공허해서 괴로워할 거야. 그런데 그 괴로움도 너희가 선택한 게 아니라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는 바위를 끝없이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카뮈는 이 신화를 현대인의 부조리한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시시포스보다 훨씬 복잡하다.

시시포스에게는 최소한 명확함이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위 밀어 올리기)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이런 벌을 받는지 이유도 알고 있었다 (신들을 기만한 대가)


반면 현대인에게는 이런 명확함조차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바위가 무엇인지도 모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영원한지 유한한지도 모름)

왜 이렇게 된 건지 이유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의미를 찾을까? 의미를 만들까? 의미를 포기할까? 책임을 질까? 책임을 회피할까?" 이 질문들 사이에서 끝없이 왔다갔다하면서, 정작 무엇이 우리의 '바위'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더 잔혹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의미를 만들면 책임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고, 의미를 포기하면 공허함이 가슴을 메운다. 책임을 지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책임을 회피하면 자기혐오에 빠진다.

시시포스는 최소한 자신의 바위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바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했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부조리한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시시포스보다 복잡한 운명을 타고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완벽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이 모순적 상황에서 터득할 수 있는 몇 가지 불완전한 지혜는 있을 것이다.

첫째, 불완전함을 친구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의미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지는 책임도 부분적이다. 우리의 선택도 제한적이다. 이런 한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완벽한 의미, 완벽한 책임, 완벽한 선택을 추구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불완전하더라도 작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작은 책임이라도 져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둘째, 연대의 힘을 믿는 것이다. 혼자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순도 함께라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같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의미를 갈구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이 모순적인 존재들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버텨나가는 것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셋째,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미가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고 싶어하는 동시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모순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 이 역설적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지"는 알게 되니까.

이것이 전부다. 장엄한 해결책도, 완벽한 답도 없다. 다만 우리는 시시포스보다 복잡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바로 그 복잡함 속에서, 그 모순 속에서도 살아간다는 것.

결국 우리는 명확한 바위도, 명확한 이유도, 명확한 끝도 없는 이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어쩌면 그 길 위에서, 불완전한 우리만의 방식으로 걸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2420691674367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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