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20세기 후반 철학계에 등장한 가장 매혹적인 사상 중 하나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는 그의 명제는 자아중심적 서구 철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제공했고, 수많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철학적 비전이 과연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상론적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 자아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타자를 자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동일자의 철학"을 거부하고,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했다. 그의 철학에서 윤리는 존재론보다 더 근본적이며,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철학의 핵심은 비대칭적 책임 개념이다. 나는 타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지지만, 타자가 나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이는 전통적인 상호주의적 윤리관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다. 타자의 취약성과 무한성 앞에서 자아는 절대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언뜻 보기에 이러한 사상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윤리적 성찰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타자윤리학은 다문화주의, 난민 문제, 소수자 권리 등 현대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을 사유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물론 레비나스 철학 연구자들은 '무한한 책임'을 문자 그대로의 실천 명령이 아니라, 윤리적 태도나 지향점으로서의 '방향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즉, 타자를 향한 끝없는 열림과 응답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조차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 '방향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인 윤리적 가이드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둘째, 설령 방향성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상충하는 여러 방향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선택의 딜레마'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여러 타자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 같은 민족과 외국인,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에서 말이다. A라는 타자를 돕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면, 필연적으로 B라는 타자는 외면하게 된다. 이때 '타자를 향한 방향성'만으로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실제로 무한한 책임을 지향하려는 시도조차 개인의 파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모든 타자의 고통에 열려있으려 하고 끝없는 응답 가능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 개인은 심리적 과부하와 윤리적 마비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지속 가능한 윤리가 될 수 없다.
타자윤리학의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 20세기 공산주의의 역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인의 윤리적 태도를 다루는 타자윤리학과 사회경제 체제를 제시하는 공산주의는 그 본질과 적용 범위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이자 사회제도적 프로그램이었던 반면, 타자윤리학은 개인의 윤리적 성찰에서 출발하는 철학적 사유다.
그러나 두 사상은 중요한 구조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첫째, 둘 다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서 출발한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했듯, 타자윤리학은 서구 철학의 자아중심성을 비판한다.
둘째, 둘 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상적 비전을 제시한다. 계급 없는 사회와 무한한 책임이라는 이상 모두 현실의 불완전성을 초월하려는 시도다.
셋째, 둘 다 그 이상의 실현 과정에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간극에 직면한다.
공산주의는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주의, 중국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 끔찍한 결과들로 이어졌다. 이상적인 목표를 위해 현실의 인간들이 희생되었고, 권력의 집중과 부패, 경제적 비효율성이 만연했다. 결국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체제를 포기하거나 시장경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단순히 실행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본성과 사회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은 완전히 이타적일 수도, 완전히 합리적일 수도 없는 존재다. 복잡한 욕망과 감정, 개인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 사이의 갈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타자윤리학 역시 이와 유사한 인간학적 한계에 직면한다.
타자윤리학도 공산주의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윤리적 성찰은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려면 필연적으로 제도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법률, 정책, 사회제도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래의 윤리적 순수성은 필연적으로 훼손된다. 무한한 책임은 유한한 예산으로, 절대적 환대는 선별적 정책으로,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응답은 조건부 지원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제도는 일반성과 예측가능성을 요구하지만, 타자윤리학이 추구하는 것은 절대적 특수성과 무조건성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타자윤리학을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를 낳을 위험이 있다. "타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제약될 수 있고, "진정한 윤리"를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계몽하려 할 수 있다. 이는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들이 희생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리적 이상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이상 자체가 아니라, 그 이상을 절대화하고 현실과 괴리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윤리적 태도다.
현실적인 윤리는 완벽한 선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선을 추구한다. 모든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져야 할 책임을 인정한다. 절대적 희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배려와 연대를 지향한다.
이는 타협이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한 성숙한 접근법이다. 완벽한 이상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실현 가능한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이다.
타자윤리학은 분명 중요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자아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인정, 윤리의 근본성에 대한 강조 등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화하고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 할 때 위험한 이상론으로 전락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가 보여주듯, 아무리 아름다운 이상이라도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다면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도 아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형을 찾는 지혜다.
진정한 윤리는 완벽한 선이 아니라 더 나은 선을 추구하는 것, 절대적 희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책임을 지는 것, 무조건적 이타주의가 아니라 합리적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 윤리만이 인간다운 삶과 더 나은 사회를 동시에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