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분들에게 추천하는 글입니다.
1. 나에게 맞는 와인을 찾고 싶으신 분
2. 늘어선 와인 앞에서 막막해지시는 분(편집숍에서, 레스토랑에서)
3. 간단히 배운 지식으로 하루빨리 잘난 체하고 싶으신 분
목차
1부: 들어가며
2부: 알아보기
(1) 와인이란
(2) 향과 질감
(3) 라벨 읽기
3부: 비교하기
(1) 세계적으로 재배되는 품종
(2) 지역 고유의 품종
4부: 즐기기
(1) 와인과 맞는 음식
(2) 테이스팅 노트
5부: 나가며
와인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지레 겁먹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우리는 왜 와인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까? 단순한 발효주인데도 왜 이리 멀게 느껴질까? 과일 발효는 원숭이나 새도 할 수 있다* **. 양조에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심지어 같은 발효주인데도 막걸리는 게걸스레 찌끄리면서 와인은 괜히 혀를 씁 굴려볼까? 이는 와인에 대한 오해가 겹겹이 둘러쳐져 '포도를 삭힌 술'이라는 본질은 가려지고 모호한 이미지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오해들과 그것을 오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래의 네 가지이다.
① 전문가의 존재
와인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복잡한 평가 기준이 부담스럽다. 이로 인해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탄닌감이니 바디감 따위의 생소한 용어는 사실 알고 나면 별거 아니다. 탄닌감은 떫음으로, 바디감은 점성이나 목 넘김으로 대체할 수 있는 말이다(2장에서 다루겠다). 또, 소믈리에(sommelier)라는 와인 전문가의 존재는 성역화된 와인의 정점에 서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취향엔 특별히 민감한 사람과 유달리 호기심 많은 사람을 위한 시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바리스타보다 동네 카페의 커피가 좋은 사람들, 미슐랭 셰프보다 내가 만든 집밥이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와인에 대해서만 소믈리에의 엄격한 기준을 따르는가.
② 병마다 다른 맛
와인 한 병의 맛은 포도 품종, 떼루아(terroir: 포도 산지의 토양과 기후), 와이너리, 숙성 방식, 숙성 기간 등 다양한 변수의 방정식이다. 이러한 복잡성은 자칫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게 따지면 김치도 엄마의 고향, 재료, 손맛에 따라 맛이 다르다니까? 평범한 우리가 서로 다른 와인을 구별해 내기 위해 느낄 수 있는 두드러진 요소는 포도 품종의 고유한 특징이 9할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들어진 와인과 쉬라즈로 만들어진 와인은 눈을 가리고 마셔도 구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요소는 웬만한 사람은 구분할 수 없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와인 애호가나 미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닌 이상 떼루아나 와이너리의 차이는 구별해 내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한 예로 2011년과 2013년은 세계 최대 고급 적포도주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역의 기후가 좋지 않아서 당시 생산된 와인은 맛이 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르도의 같은 와이너리, 같은 품종인 와인을 당시에 만들어진 병과 바로 다음 해에 만들어진 병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③ 이국적 이미지
와인은 대개 해외에서 생산되고 외국 문화와 결합돼 이국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요소는 소비자들이 와인을 어렵고 멀게 느끼게 한다. 이에 더해서 와인에 대해서 “고급진 영역이라 어렵다”는 인식은 우리나라 제조업 기반이 약했던 역사로 인해 미제, 일제, 독일제를 최고로 치던 시대상이 남아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혹자는 사대주의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서나 이국적인 것을 좋게 그리는 현상은 발견된다. 19세기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이는 모네와 고흐의 색상 사용과 구성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는 중국 차의 높은 품질과 다양한 종류의 영향을 받아 귀족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외국 것은 처음엔 누구에게나 낯설기 마련이니 괜히 겁먹을 필요는 없다.
④ 미디어의 영향
각종 대중매체에서 와인은 종종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와인을 소재로 한 일본의 한 만화의 제목은 <신의 물방울>이다. 제목부터 허세 가득한 이 만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신의 물방울에 소개된 12종의 와인은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12종 모두 고가의 구대륙 와인***인데 이는 일본의 프랑스 우월주의가 반영된 결과이다. 우리의 인스타그램 피드 속 기념일 식탁엔 꼭 와인이 올라가 있다. 명품 가방과 함께 고기를 썰 때 와인이 빠질 수는 없다. 이러한 풍조는 우리가 와인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와인이 일상적이기보다는 특별한 상황에 소비해야 하는 술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런 이미지는 내가 만든 생각일까, 남이 심어준 생각일까?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돼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어렵고 복잡한 음료로 인식한다. 하지만 와인은 결코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와인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자! 나는 감히 와인을 “서양 막걸리”라고 부르고 싶다.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막걸리****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와인이 흔한 일상일 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아페리티프(apéritif: 식전주)로써 볼가심하고, 식사 중에는 테이블 와인을 곁들이고, 식사 후에는 디저트 와인을 마신다. 또 그렇게 비싼 와인을 마시지도 않는다! 와인 소비량이 높은 국가 대부분은 중저가 와인 시장 중심이다. 세계에서 가장 와인 소비량이 많은 미국에서 2024년 3월 미국 시민 1117명에게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5%는 한 병에 $11~$20 하는 저가 와인을 선택했고, 평생 구매해 본 가장 비싼 와인이 $40을 넘지 않는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68%였다. 이렇듯 세계적으로도 고급 와인은 소수의 문화이며 대부분의 국민이 평범한 수준에서 즐기는 건전한 식문화일 뿐이다.
우리도 편한 마음으로 와인을 대하자. 이 글을 천천히 따라가 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와인을 고르는 법을 배워보자. 와인 애호가들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영화 <사이드웨이>에 나오는 대사를 소개한다.
"특별한 날 특별한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슈발 블랑'을 마시는 날이 특별한 날이에요."
와인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날에 마시는 특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꼭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맞는 보통의 와인이 나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당신의 취향에 맞게 ‘쉽게 고른 평범한 와인’이 당신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길 바란다. 내 손으로 와인을 골랐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그래서 와인이 더욱 향기롭게 느껴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지금부터 이 글을 따라 와인과 친해져 보자. 손에 잡히는 아무 와인이나 한 잔 찌끄리며 읽어도 좋겠다. 당신의 즐거운 와인 생활을 위하여, Cheers!
* 美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생물학자 로버트 두들리 박사는 2014년 그의 저서 <술 취한 원숭이: 인간은 왜 술을 마시고 남용하나>(The Drunken Monkey:Why We Drink and Abuse Alcohol)를 통해 인간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로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을 제시했다. 인간의 알코올 소비는 수백만 년 전 유인원 조상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형성된 에탄올이 있는 과일을 골라 먹던 데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2022년 노스리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인류학자 크리스티나 캠벨 교수의 연구진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한다. 거미원숭이가 먹다가 버린 과일을 수거해 분석하니 알코올 농도가 1~2%에 달했다는 것.
** 주로 열대에 서식하는 앵무새나 과일비둘기들은 과일이 발효되기를 기다렸다가 섭취한다. 2022년 호주 킴벌리에서는 앵무새들이 발효된 망고를 먹고 음주 비행하다가 건물에 부딪혀 죽거나, 고양이가 다가와도 도망가지 못하고 죽는 일이 벌어졌다고.
*** 구대륙 와인은 주로 유럽의 전통적인 와인 생산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생산된다. AOC(프랑스), DOCG(이탈리아) 등 품질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으며, 지역의 전통과 품종을 중요시한다. 특정 지역에 적합한 전통적 품종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보르도 지역의 카베르네 소비뇽) 지역의 떼루아에 따라 와인의 스타일이 달라진다. 반면 신대륙 와인은 미국, 아르헨티나, 칠레, 호주, 뉴질랜드 등 후발 주자들의 와인이다. 와인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더 많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기술과 방법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내추럴 와인, 우드칩 와인). 다양한 품종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글로벌한 품종을 많이 사용한다(캘리포니아의 피노 누아). 주로 과일 맛이 강조되는 편이다.
**** 서울의 30년(1991년~2020년) 강수일수는 108.6일이다. 연중 100번 넘게 막걸리를 떠올리는 우리, 와인도 그렇게 일상의 한 부분처럼 떠오를 수는 없을까? 참고로 강수일수는 강수량이 0.1mm 이상인 날의 수이다. 비, 이슬비, 얼음싸라기, 눈, 싸락눈, 진눈깨비, 싸락우박, 우박, 눈보라 등이 포함된다.
***** YouGov 조사, 1117명의 미국 성인 시민 대상, 조사기간 2024년 3월 5일~11일, 오차범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