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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써 보는 의사 Aug 18. 2024

"왜 낫지 않는 걸까요?"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너는 무슨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사니?


어렸을 때부터 나는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솟아날 기미가 없었다.


콜린 윌슨이라는 작가는 1956년 아웃사이더라는 책으로 비평계를 뒤집어놓았다. 니체, 도스또예프스키, 헤르만 헤세, 카프카, 까뮈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그가 정의한 아웃사이더라는 번득이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최근까지도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도 어찌 보면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묻어난다.


사람들은 그 작품들에 감동하고, 그것을 칭송하고 기억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그 문학 속 주인공 같은 사람과 삼겹살을 마주 두고 앉아 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 저 사람 멋있다' 하고 느낄까? 아닐 것이다.


'쟤는 왜 저래?'

'재미없어'

'또라이'

'쟤 좀 특이하니까 너무 가까이하지 마'


아마 뒷담화의 안주로 오르내릴 것이고, 왕따나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사실 이것이 글이 주는 위대함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우리가 비웃는 것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똑같은 표현을 말로 전하면 무시하거나 그냥 흘려들어도, 글이 되면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영상 매체가 대세가 되어도 글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믿기에 글을 쓴다.

영상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글이든 영상이든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겠지만, 글은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글이 어째서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관람객과 독자라는 각 매체를 대하는 입장의 차이에서 온다. 그래서 각기 다른 태도로 그 매체를 대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그 자체를 하나의 주제로 해서 나름의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놔 볼 생각이다.



나는 문학의 주인공처럼  대단하거나 흥미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만 그냥 '특이한' 사람일 뿐이다. 항상 내가 고민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왜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사실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나도 그 상황을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대화할 때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를 꺼내놓을 때다마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정말 하고픈 얘기를 하지 않고 그냥 신변잡기나 돈 버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일, 자극적인 사건, 지금 당장 흥미롭고 재밌을 법한 것들을 소재 삼기 시작했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다들 지루해했다. 심지어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어릴 때는 아무 상관없었고, 철없는 시절이 다 그렇듯 때로는 훈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화살이 되어 나를 쏘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면, 사회생활, 사람 관계에 손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숨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도 살아야 하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직업은 의사이다.

알고 있다. 의사면 됐지, 뭘 바래. 너도 기득권일 뿐이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그런 시선들. 그래서 솔직히 꺼내놓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현행 의료 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시점이고, 의사라는 직함의 사회 경제적 위치도 이제 크게 달라질 터이지만,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나름 인정해 주는 직업군이긴 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내 직업의 가치에 의문을 품었었다. 오히려 쓸모없고 심지어는 때로 해악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나는 '이상한' 존재였다.


나는 직업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이다. 그저 그 가치는 돈이라는 교환 가치 빼고는 없다. 어떻게든 버티고 넘겨서 그 돈으로 취미 생활, 여행 등, 남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억지로 참아야만 하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먹고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여행 따위 꿈도 못 꾸는 사람들도 있다. 이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결국엔 어느 시점에 그 만한 가치가 보상으로 돌아올 줄 믿는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워라밸이다.

워킹 라이프 밸런스. 사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중요하다. 한 예로,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출 때에 안정감과 전반적 만족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워라밸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일이 일 나름의 보람과 가치가 있고, 그 가운데 삶의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저 일하는 시간을 가능한 줄여 이외의 나머지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일은 그저 즐기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는 수단일 뿐일까?

그렇다면 현대의 일이란 언젠가는 때려치워야 할,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일까?


정답은 없다. 다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맞는 것 같지 않다.  

만약 하루에 8시간을 일한다면, 하루 24시간의 1/3을 차지하는 셈인데, 과장해서 거의 평생을 일하고 죽기 전 되돌아봤을 때, 말하자면 인생의 1/3쯤을 흘려보낸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과연 기분이 어떨까? 그저 지겹던 일을 그만뒀으니 그걸로 후련한 것일까?


사실 나는 워라밸이라는 신조어에 숨은 가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가정. 언젠가는 벗어던져야 할 그 무엇이라는 가정 말이다. 그러므로 워킹 라이프를 분리하고 밸런스를 찾아 내 삶을 따로 즐겨야만 하는 것이다. 이 일이 내 삶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취급하기에는 일하는 시간이 삶에서 너무 길지 않은가.

이 시간을 그저 나중을 즐기기 위해 참는 시간으로 보내야만 할까? 그렇게 평생을 보낸다면 정말 후회가 없을까? 죽기 직전,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며 산 것인가 허망하지 않을까?  

자랑스럽게 나는 이 일을 하고 살아왔노라 말하고 눈을 감고 싶다면 그것은 과대망상인 것일까?

 


마틴 셀리그먼의 행복론을 변형시켜 보면,


1. 즐거운 삶 : 여행, 식도락, 각종 도파민 자극제들.

2. 몰입하는 삶 : 모든 것을 잊고 그 순간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취미나 경험들.

3. 만족하는 삶: 전반적으로 무난하고 갖춰진 삶, 리스크 없는 삶.

4. 의미 있는 삶


이런 삶들이 모여 하나의 인생을 이룬다고 할 때, 1번 2번만 있으면 충분한 것일까?


'직업'이라는 단어에 끼어 있는 부정적 뉘앙스를 감안하여, 내가 하는 무엇을 '일'이라고 해보자. 꼭 직업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 이것이 점차 쌓여서 결국 내가 생을 마감할 때 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할 것이다.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무슨 상관이야, 즐기고 살면 되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렇다면 굳이 의미 따위 따질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대로의 삶을 살면 된다. 아마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 이런 지루한 글을 읽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 발을 붙이고 살 것이라면, 내 직업을 해서 먹고사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고. 나도 현실을 충분히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먹고살기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 일에 더 집중했다. 거기서 의미를 찾고, 그 안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흘렀고, 나는 더 이상 천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나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말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의 어떤 일식 셰프 얘기가 있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청년이 일식집을 이어받아 열심히 하는 도중 도무지 천성에 맞지 않아, 말 그대로 '천직이 아니'라고 생각해 관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지만, 돈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한 10년쯤 보내고 결국 다시 일식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런데 이제는 이 청년-이제는 장년이 된-은 정말로 자기 일을 천직이라 여기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10년 간 일식 셰프라는 직업이 크게 변한 것일까? 아니면 그 청년이 변한 것일까?


아마도 그 직업을 받아들이는 그의 관점이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 직업의 중요성은 직업 그 자체보다, 그 직업을 받아들이는 그의 생각과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사실 '어떤 일을 통해서든' 당신이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실현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직업이 무엇이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당신이 생각만 바꾼다면. 그러므로 직업의 명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없는 사람은, 하고 싶은 일도 끝까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도 언젠가는 하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기 싫을 때마다 그만뒀던 경험이 학습된 사람들은  그 '하기 싫음'이 찾아올 때, 이 일은 '나와 맞지 않아'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반복적 담금질이 철을 단련하듯, 직업의식과 삶을 성장시키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사랑도 비슷하다. 나에게 맞는 짝, 솔 메이트, 이상형 만을 찾아 헤매면, 설사 이상형을 만나도 얼마 못 가 실망해 헤어지게 된다. 그저 자기중심적인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을 찾아다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과 인격이 자라나고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과도 한평생 같이 지낼 만한 배려와 포용력이 갖춰지지 않다면, 그 어떤 이상형을 만나도 결국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결점을 발견하고야 만다. 그 결점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성숙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게 안되면, 오로지 상대의 잘못, 상대의 문제로만 떠넘기게 되고, 결국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마따나, 사랑은 나의 능력(기술)이지, 대상이 아니다


나는 직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많은 방황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 많이도 돌고 돌았다. 나는 언제나 빙 돌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를 깨닫는 데 남들보다 더 오래 걸리지만, 대신 돌아온 그 길의 길이만큼 더 많은 풍경을 보고 듣고 느꼈다고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 에둘러온 경험들이 결국 나를 더 깨닫게 한다고 믿는다. 직선으로 갔다면 나는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같은 결과를 얻는 데 남들보다 더 오래 걸리는데 반해, 내 인생의 길이는 결코 남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사소한 시간 낭비가 참 아깝다.   


그러므로 나는 워라밸이라는 신조어에 숨어 있을,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가정을 뒤집어엎어 보려 한다.



일은 곧 삶이다




워라밸 (working life balance)   --->>   워라샘 (working life the same)



일이 곧 삶이 되면 더 이상 밸런스는 필요 없다.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되고, 그 자체로 커다란 삶의 의미가 된다. 죽을 때,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는 이런 일을 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는 살아온 생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믿는데, 그 가치의 일부는 상대성에서 온다고 본다. 상대성이란 '남과의 다름'이다. 내가 남과 다른 점, 그게 장점이든 단점이든 그게 존재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근원이고.

그래서 자신이 남과는 다른 그 점을 속절없는 시간 속에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흔히 그것을 장점이라고 해석할 때에는 재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꼭 남들이 인정하는 장점일 필요는 전혀 없다. 나처럼 남들로부터 특이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 특이함이 바로 당신이 남과 다른 점이고, 그것이 당신의 재능이다. 특이함이 곧 특별함이고, 그것이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될 수 있다.  


2007 년 독일 영화 '4분'에서, 재능을 허비하는 천재 피아니스트를 향해 그녀를 가르치던 스승이 말한다.


"재능을 썩히는 건 죄야."


정확한 대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비슷한 대화가 있었다.


나 역시 동의한다. 재능을 썩히는 것은 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서 재능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남과 다른 어떤 점일 뿐이다. 그 점이 남들 눈에 잘났든 못났든 그건 상관없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재능을 나타내라
양껏!!!!






그래도 어쨌거나 현실은 현실이다. 삶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현실 속에서 남들처럼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노력한다. 겉으로 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 나름의 철학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말하자면 머리는 하늘에 두고, 발은 단단히 땅에 붙여두려고 한다. 머리와 발이 모두 하늘에 있으면, 그 사람은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세상을 둥둥 떠다니며 살게 될 것이고, 반대로 머리와 발이 모두 땅바닥에 박혀 있으면 그 사람은 별 하나 뜨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현재 나는 개원의 5년 차에 이르렀고, 지금은 병원을 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병원도 사업이고, 사업은 소통이다. 소통하지 않고 사업할 수는 없다. 나는 원래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사람이고 사업가 타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저 누구 밑에서만 일했더라면 평생 내 안에만 갇혀 살았을 것이다. 내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의미는 나를 걸어 잠그고 내 세계에서만 생활할 때가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와 소통 속에서 발생한다. 이 전 우주에 아무것도 아무런 물질도 없이 나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번 예쁜 옷을 입는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예쁜 옷을 입는다 한들 그 옷이 자기를 만족시킨다 한들, 이 우주 전체에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면, 단 하나의 존재도 없고 먼지조차 없다면, 그 옷을 입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 옷이 정말 '예쁜' 옷이 될 수 있을까?


병원을 개원하고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대구에서 개원하자마자 바야흐로 시대의 흐름을 뒤바꿔 놓은 코로나가 대구부터 시작됐다. 하루 한 명 겨우 환자가 올 때가 있었고,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속된 말로 존버해서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그 힘든 시간들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유명한 철학자의 말마따마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다.







왜 낫지 않는 걸까요?



이 제목 하나를 얘기하기 위해 서두가 이렇게나 길어졌다. 사실은 오늘 글 하나를 어떻게든 남기려고 짧게 빨리 쓰려던 요량이었는데, 되레 쓸데없는 말만 많아지고 있다;;   이제 정리해보려 한다.
정작 위 물음에 대한 답은 자세히 쓸 수 없을 것 같다. 읽는 사람들에게 좀 미안해진다.


'왜 낫지 않는가?' 이 질문은 의사가 된 이래로 항상 나를 괴롭혔고, 이제는 그에 대한 내 나름의 당연하고도 허무한 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병원 철학에 그 힌트가 담겨 있다.


건강이란 당신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아,
당신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는 것이다.



위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연이 떠오른다.


이 글 제목의 문장과 병원 철학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또 자세히 다루겠다. 당장에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블로그 링크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다. 읽어보시면 어째서 저런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잘 이해되시리라 믿는다.


어쩌면 앞으로 이곳에 쓸 글들은 일을 통해 어떻게 내 삶을 찾아 나가고, 또 나를 발견해 나가고, 나름의 삶을 완결-완성이 아닌-할 수 있는지 그 고민을 쓰게 될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나와 비슷한 누군가, 외롭게 '삶과 다투듯'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병원 철학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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