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사소한 철학 첫 번째 - 현시점
예고했듯이, 2025년 12월 13일의 기록으로 먼저 시작한다.
(이 기록으로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현재-정확히는 12월 13일까지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한 결과이기도 하고, 이 글을 쓰고서 브런치에 글을 올리자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처음 보는 분은 '가슴속 사소한 철학 - 시작'을 먼저 봐도 좋다. 아니면 이 글부터 봐도 된다. 상관은 없다.
2025년 12월 13일의 흔적
나는 삶을 신뢰하고
삶은 나를 신뢰한다.
그렇게 쌍방 간에 서로 신뢰가 오갈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이 자유는 주체적 선택이면서 무거운 책임의식임과 동시에 겸허한 수용이다.
다시 말해 의식과 무의식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자유의지와 운명이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며(자유의지), 그 결과가 내 생각과 전혀 달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운명).
이럴 때 자유의지와 운명은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손을 맞잡고 간다. 이때 삶의 매 순간은 예측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경이롭고 목적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모험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한 모험을 헤쳐가는 생의 에너지가 되며 불안은 새로운 변화를 낳는다.
우울과 좌절은 그동안의 선택의 결과들에 대한 미련을 지우고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계기가 되고, 이때 모든 감각과 감정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재정비가 이뤄진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자유는 매일 눈을 뜰 때마다 갱신된다.
왜냐하면 이 자유는 고정된 지점이나 형태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계속 움직이고 자라나므로.
내가 미성숙한 존재일 때,
나는 삶을 신뢰하지 못하며, 삶도 나를 신뢰하지 못해 놔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가 없다.
아주 오랜 시간 나는 삶을 신뢰하지 못했으며, 삶도 나를 신뢰하지 않아 나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놔주지도 않았다.
그 삶은 안전하지만 자유롭지도 못하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창조도 없다.
마치 성숙한 부모가 아이를 보는 것과 같다.
아이는 미성숙해 돌봄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간중간 개입도 하고 책임도 대신 져준다. 대신 아이에게 완전한 자유란 없다.
그러나 아이가 성숙해질 시점이 오고 부모가 아이를 신뢰하기 시작하면, 부모는 이제 개입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그리고 아이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 다만 믿고 지켜본다.
아이는 잠시 버림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 결과를 감당하며 좌절을 겪고 공포와 두려움을 거치며, 그것이 자유임을 깨닫게 된다.
만약 아이가 그 공포와 두려움을 회피한다면 부모는 영원히 아이의 뒤를 봐주고 아이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자유도 없다. 보호관찰한다.
두려움은 자유로운 자의 특권이다.
자유는 대단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오지도 않고,
특별한 고통과 수련을 거친 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모든 외부 조건을 획득하고 현실의 목표를 성취한 사람에게도 오지 않는다.
그저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스즈키 선사가 죽고 싶지 않다고 더 살고 싶다고 한 말이나
카잔차키스가 묘비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한 말이나 결국 같은 말이다.
이 말이 완전히 다른 말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두렵다' 라는 말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렵다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 두려움은 아주 중요하기에 자주 등장하게 될 것 같다.
왜 스즈키 선사의 살고 싶다는 말과 카잔차키스가 (죽음을 포함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말이 같은 말인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때가 있을 것이다.
ps. 한 가지 더. 나만 외롭지 않다. 당신만 외롭지 않다. 모두 똑같다. 다만 말을 안 할 뿐. 그러므로 이제 쓰는 글들이 외롭게 싸우는 누군가에게 다소나마 힘이 되길 바란다. 당신만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다. 다 그렇다. 모두 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살고 고민하다 죽는, 인간이다.
이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을 막을 수 있고, 또 이 생각이 다른 모두와의 연결감을 불러오며, 그로 인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가치 또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 덧붙인다.
정말로 당신 혼자만 외롭지 않다.
또 하나, 위에서 자유의지를 언급했지만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없다는 쪽에 가깝다. (뇌과학 쪽으로 들어가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많다) 다만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중요하다. 나는 실제 현상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체험보다 해석이 더 중요하다. 실제가 어떻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믿느냐에 따라 실제 삶 속에서 그 반응과 결과는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내려놓고 섭리대로 살아가는 삶 역시 결국에는 자유롭다.
실망스러운 사실을 하나 미리 밝히자면, 앞으로 여러 말장난들이 반복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려 할 때, 커다란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저런 비유와 상징이 섞이게 될 것이다. 약간 모호한 여지를 둘 때, 그 모호한 공간이 읽는 이의 경험에 따라 그 결에 맞는 해석을 불러온다. 이 부분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할 때 항상 중요하다.
또 하나 실망스러운 사실. 여기 올리는 글이 100프로 솔직하리라 기대하진 말라. 100프로 솔직한 글은 여기 올리지 않는다. 그건 그저 일기장에 있다. (그거 아는가? 사람들은 심지어 때로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다. 나도 그렇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만, 100프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보이는 글에서 100% 완전히 발가벗는 건 쉽지 않다. 80프로쯤 되면 그것으로도 아주 훌륭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