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샤워 꼭지에게서 들었던 얘기
단단한 샤워 꼭지 아래
몸뚱이 맡기고 서러움 뜨거운
물줄기에 흘려보내고
피처럼 엉겨 붙은 비린내 씻어버린다
똑 똑 똑
어떤 눈물도 해주지 못한 얘기를 금속 꼭지에게서
듣는다
-나는 오늘도 이 뜨거움을 홀로 견뎌낸다오
보상은 없소 그것이
내일이라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그래도
남은 젖은 물기가 짐승처럼 씩씩거린다
그 물기로 거울에 쓴다
일기마저 타자 치는 세상일지언정 시는
손가락으로 쓰리라
그것이
나의
복수다
내 얼굴이 마침표처럼 찍혀 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결과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느냐 아니냐 보다는, 계획에 없는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결국 성패를 좌우한다.
지금 글도 그렇다. 다음에는 무엇을 쓸까 잠시 고민했다. 건강에 대한 사례들과 의학적 정보, 거기에 내 해석을 곁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소재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뭔가 당장에는 끌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글들일 텐데.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원래 계획대로 사는 인간은 아니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다. 사판이라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말하자면 이성적인 분석인 셈이고, 이판이라는 것은 직관의 영역이다. 사판이 맞아도 이판이 맞지 않으면 뭔가 빠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이판만 따르면 사판은 사달이 난다. 우물 안에 갇혀 혼자 부르는 노래에 심취하는 꼴이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꼴값이 되고 만다.
내가 브런치를 왜 시작했더라?
그러던 차에 다시 저 시와 마주쳤다. 일단 필 꽂히는 대로 가자.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이판과 사판이 맞아 들어가려면 일단 경험이 필요하다. 과정이 어긋난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어차피 나는 빙 돌아가는 사람 아닌가?
저 시는 20대 말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낡아서 너덜거리는 신발 밑창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할 때
낙엽은 위로받고 싶어 흙바닥 위로 떨어지고
나는 너에게로 간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처자였던 지금의 아내에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갔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스레 저 시를 꺼내 들게 된 것은 나에게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저 시가
여전히
부끄럽지 않았다.
그것이 충격이었다.
20대의 착각 = 40대의 확신
이 공식이 성립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찔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인가?
나는 애써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봤다. 조금이라도 다른 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려 봤다.
그때는 앞 못 보는 시인처럼 살고 싶었고, 지금은 눈 뜬 맹인처럼 살고 있다.
그때는 불필요한 단어처럼 살았고, 지금은 필요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는 세상이 두 쪽 나도 한 사람만 지키면 된다고 믿었고, 지금은 세상이 두 쪽 나기 전에 세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아내와 두 아들이다.
그때는 박수를 받고 흉내 내듯 살았고, 지금은 박수받을 때 내 삶을 의심한다. 어떤 의미에서, 박수받지 못하는 것은 내 삶을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일곱 사람한테 박수받지 못하고, 세 사람에게 박수받을 때 인생은 흥미롭게 돌아간다.
7번 성공하고 3번 실패할 때,
7만큼 계획대로 되고 3만큼 계획이 어긋날 때,
7만큼 열심히 일하고 3만큼 쉴 때,
7만큼 확신하고 3만큼 의심할 때,
7만큼 남 얘기를 듣고 3만큼 내 생각을 고집할 때,
7만큼 가정에 힘을 쏟고 3만큼 일에 힘을 쏟을 때,
7:3으로 살 때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에너지 넘치고, 자신감 있되 겸손하고, 어떠한 역경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결심만 했지만, 지금은 결심하면 환경부터 바꾸려고 한다. 누군가 그랬다. 야망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내가 얼마나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노예인지 잘 알고 있다. 정신력을 과신했다가는, 영원히 같은 구덩이에 빠지는 낭패를 반복할 뿐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번역은 제멋대로 했으니 비난은 감수하겠다.
1.
나는 길을 따라 내려가네.
길 옆에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그곳에 빠지네. 난 길을 잃고, 절망에 빠지네.
이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
빠져나오는 데 거의 영원의 시간이 걸리네.
2.
나는 길을 따라 내려가네
길 옆에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여전히 보지 못하네. 다시 빠지네.
또 같은 곳에 빠지다니 나는 믿을 수 없네.
내 잘못이 아니네.
여전히 빠져나오는 데 한참이 걸리네.
3.
나는 길을 따라 내려가네.
길 옆에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그것을 보네, 그러나 다시 빠지네.
이건 버릇이야. 내 잘못이야.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네.
나는 즉시 빠져나오네.
4.
나는 같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길 옆에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구멍을 돌아가네.
5.
나는 다른 길을 걸어 내려가네.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만약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2년 동안 반복한다면 2억을 주겠다고 상금을 걸면, 과연 몇 명이나 성공할까? 아마 성공하는 사람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쪽에 돈을 걸겠다. 대단한 하나의 일을 해내는 것보다 별것도 아닌 일을 계속하는 것이 더 대단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런 말을 말했다. 천재적인 작품 하나만 내놓은 작가를 자신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작가는 계속해서 글을 내놔야 한다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알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혹은 '인식의 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몰라서 못한 것 아니라 알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당장 부모님이 위독해지기 전까지는 안 한다. (이미 잘하는 분들에게는...미안합니다 ^^;;) 부모님이 말기 암 진단을 받는다면 후회하며 그제야 신경 쓴다. 그러다 기적처럼 부모님이 회복되면 어떤 사람은 계속 그 마음을 유지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 다시 소홀해진다. 상투성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허진호 감독, 황정민, 임수정 주연의 '행복'. 황정민이 간경변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간다. 거기서 임수정을 사랑하게 되고 나와서 같이 살다가, 임수정의 헌신으로 병에서 회복한다. 그러나 황정민은 평범한 일상을 지루해하다가 임수정을 떠나고 전과 같은 삶을 다시 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정민은 다시 토혈을 한다.
우스펜스키가 쓴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이라는 책도 있다. 알라딘의 책 소개를 옮겨와 보자면,
'다시 산다면 결코 똑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모든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결코 잘못된 선택들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국 그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다시 학생 시절로 돌아가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궁금한 분은 책을 찾아보시면 되겠다.
지금껏 살아온 나 자신을 보면 그렇다.
지금 당장 자신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어차피 돌아가도 똑같다.
사실 돌아가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어쩌면 자신이 왜 바뀌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과 그 실패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흔히 시지프스의 돌이라고들 한다.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고,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고... 설사 그것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는 돌을 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당히 허무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허무함은 여백이고, 여백은 언제나 그림을 그릴 여지가 있다.
자식이 시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항상 위로받고 싶었지만 내 주위 모든 것이 위로라는 사실을 몰랐다.
삶이 허무할수록 머릿속은 멍해지고 두통이 생겼다.
나는 두통이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인생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이기를, 40년을 기대하며 살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저 텅 빈 흰 캔버스라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캔버스를 끌어안고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나는 감동했다.
그 캔버스 위에는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흰 캔버스를 타고 흘러내린 내 눈물이 번져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내 절망은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이 인생의 빈 캔버스를 채워 넣는다는 것을.
인생이 빈 캔버스인 이유는 내가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는 의미였다.
다시 20대와 지금을 비교한다.
그때는 외로웠지만 지금은 고독하다.
외로움은 삶을 파괴하지만, 고독은 삶을 성장시킨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칸트가 얘기했던가, 잘 짜인 지식은 과학이고 잘 짜인 인생은 지혜라고.
잘 짜인 인생에는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을 언제 포기할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한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려면, 포기하지 않을 가치를 이미 마음먹고 있어야 한다.
느닷없이 찰스 부코스키의 묘비병 얘기를 덧붙이고 싶어졌는데 그것까지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여기에서 줄여야겠다.
이미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감사하고 대단합니다. 어쩌면 알 수 없는 허무함으로 두통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두통이 있으신 분들에게 재미로 아래 링크를 덧붙인다. 마사지하시고 오늘은 편히 잠드시길...
다만 긴 글에 두통이 더 심해져도 나는 책임 못 진다.
https://blog.naver.com/tillisee2/22355918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