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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써 보는 의사 Sep 07. 2024

선택의 대가

부담스러운 사진은 미리부터 죄송하다


오늘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야심한 시간 들어왔다. 그냥 정신줄 놓고 쓸 참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곳에 글 쓰기가 참 어려웠는데 어찌어찌 시작하고 나니 또 그냥 막 써 내려가게 된다. 어차피 지금 내가 책을 내는 것도 아니고.


나는 글쓰기를 외줄 타기라고 생각한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외줄 타기, 뭐, 사실 글쓰기만 그렇겠는가. 모든 예술이 그렇고, 심지어는 의사로서 행하는 치료조차 어느 순간이 되면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외줄 타기가 된다. 수술방에서 마취를 하면서 중대한 수술을 하는 서전들에게서 종종 그런 외줄 타기를 보고는 했다. 둘 사이의 균형이 딱 맞으면 소위 걸작이 탄생한다. 수술이라면 기적이 탄생할 테고. 기적의 순간에는 당사자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줄 자체를 놓아버릴 셈이다. 줄이 끊어지면 어디로 흘러가는지 한 번 보자. 이 글의 끝을 어떻게 맺을지는 지금 이 순간 이미 떠올랐다. 중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나도 모르겠다. 바닥이 어디인지는 알지만, 흐리멍덩한 똥물에 발을 담그고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이미 지루한 분은 페이지를 넘기시라. 여러분에게는 소중한 하루일 테니. 나오다 말아버린 재채기 마냥 찝찝한 기분을 선사하기는 싫다.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의 대가로 방 한 구석 정신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다. 

여기서 이 '선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면 항상 할 말이 많아지니, 그중 한 가지만 써 내려가보자.


나는 과거에 언제나 하기 싫은 일을 피하는 선택을 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한 번은 나름 주체적인 선택을 할 뻔한 적이 있다.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원래 이 얘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생각의 흐름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제 이 밋밋한 썰을 풀어보자. 


보통 의대 6년이 지나면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하고 전문의가 된다. 물론 과정에 따라 예외는 있고, 전문의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또 상황이 다르겠지만, 70 퍼센트는 선택을 한다고 하니(이 수치는 그냥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게 설명하고 넘어가자. 

인턴을 마칠 즈음, 전공할 과를 선택하여 지원해야 한다. 이미 지원도 하기 전에 사전 내정자들이 있다는 썰들도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아무런 힘도 빽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소신 지원할 도리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한 과는 정신과(정신건강의학과)였다.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정신과가 좀 인기가 올랐던 때였다. 2명 뽑는데 4명이 지원했고, 그중 둘은 해당 의과대학 졸업자 출신이었고 나와 나머지 한 명은 외부에서 들어온 인턴이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인턴 동기들에 비해 나이도 많았고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쫄지 않고 소신 지원하였다. 왠지 될 것 같은 이상한 직감이랄까? 

어쩌면 그 터무니없는 근자감은 애초에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이미 인턴 돌기 2 년 전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었다는 데서 왔는지도 모른다. 과연 전국에 정신과 전공을 고려하는 인턴 중 그 책을 읽고 지원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레지던트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나는 그 책을 전혀 재밌게 읽지 않았다. 마치 시험을 하루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하듯 억지로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흥미로운 부분은 있었지만 말이다. 헤밍웨이 소설이 불면증 치료제로 쓰인다는 낭설을 떠올리며 프로이트가 일부러 수면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쓴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더 많이 했다. 물론, 내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크겠지만.


정신과 면접은 수많은 함정투성이 미로 같았다. 평상시에 오랫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한 인간의 폐부를 찌르는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도 있었다. 부비트랩 같은 질문의 함정들을 리즈 시절 캐서린 제타존스처럼 각종 곡예를 부리며 잘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질문에 나름 훌륭한 답을 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당당히, 

떨어졌다.


사람을 뽑는 기준이 뭘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도 했던 사람이 존스 홉킨스 의대 정신과 교수가 되기도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참고로 이 사람은 '자살의 이해'라는 자살 관련 영역에서는 꽤나 유명한 책을 쓴 사람이다. 이 책에 관심이 생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살의 문학적 해석이 무엇일까에까지 관심이 미친다면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도 추천한다. 재밌는 책이다. 내가 재밌다고 한 책들은 가끔 절판된 경우들이 있긴 하지만, 대개 중고 시장에서도 싸게 파니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미국에서는 사연이나 동기를 높이 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너무 외국 영화를 많이 보지 말라. 한국을 미국으로 착각하는 망상 장애가 잠시 찾아올 수도 있다. 우리나라 조직 문화에서 가장 아랫사람을 뽑는 기준은 대개 말 잘 듣고 잘 부릴 수 있는가이다. 내 과거력은 그렇지 못했다. 정신과는 '과거력'을 중요시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비관주의가 깔려 있다. 즉,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바람피운 남자는 또 바람을 피울까 안 피울까?

사실 여러분들이 즐겨하는 성격 검사들도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가 약간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MBTI 만 해도 그렇다. 만약 오늘 I인 사람이 내일 당장 자기 뜻대로 E로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면, 성격 검사 해서 뭐 하겠는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사람인데. 인간은 변할 수 없다는 비관주의가 어느 정도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됐든 나는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도 내가 편한 사람을 뽑아 쓸 테니까. 나이도 많고 어딘가 주관도 강한, 학교 성적도 고만고만한, 흠 있는 사람을 선뜻 뽑고 싶겠는가?


낙방의 쓴 맛은 일품이어서 멍 때기리에 딱이었다. 그 맛을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전화기를 한 손에 부여 들고 숨만 쉬고 누워 있을 때였다. 아직은 인턴이니까 부역거리가 있으면 전화가 걸려올 터였다. 

아니다 다를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OO 선생님 맞으십니까?"

아니, 웬 정중한 말투. 누구지?

"네, 맞는데 누구시지요?"


지루한 소개가 이어지고 그 사람이 나에게 던진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면접 보러 오시겠습니까?"


정신과 지원했다 떨어졌는데, 운명인 듯 다른 병원 정신과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내가 떨어진 정신과 의국에서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이게 또 무슨 일인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운명인가 보다 흥분하며 인턴 동기에게, 오프를 바꿔달라 했는지 뒤를 봐달라고 했는지 아무튼 미안한 부탁을 하고 당장 그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쪽 전공의들의 면접이라기보다는 거의 면담 같은 면접을 보고 돌아왔는데 예상과 달리 말이 참 잘 통했다. 그들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다. 나이도 나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얘기가 잘 통했고, 왠지 여기서는 뭔가 잘 해낼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거기도 지원 경쟁이 붙은 상황이었다. 나는 나에게 전화했던 그 전공의에게 무슨 묘법은 없는지 충고를 구했다. 


"혹시 추천서 받아오실 수 있겠어요? 있으면 좀 유리할 것 같은데."

이 말을 듣고 다음 날 교수님을 찾아가야지 생각하고 있던 차에 또 우연히도 엘리베이터에서 그 교수님을 마주쳤다. 정신과 면접 때 내 면접관이었던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에게 정중히 인사드리고 혹시 추천서 가능하냐고 여쭙자, 흔쾌히 웃으면서 당연히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추천서까지 확보하게 됐다.

이번에는 되겠구나, 왠지 모를 든든함.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나는 지원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운명 같다고 생각했던 기회를 이렇게 쉽게 내팽개치다니 말이다. 물론 지원했어도 안 됐을지도 모르긴 했지만 기회는 기회였다. 내가 지원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추천서 충고를 건네준 그 전공의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내자, 그 선생님이 답문을 보내왔다. 


나는 이 답문을 거의 10년 넘게 보관하고 있다. 이 문자는 내가 흔들리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나에게 큰 도움을 준다. 그 문자를 공개한다. 미리 말하지만 대단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참 뜻깊다. 이 안에는 나의 지나온 삶과 갈등과 심지어 앞으로의 시련들에 대한 해법마저 담겨 있다. 







이 문자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할 때가 있다. 저분이 정말 무슨 이유로 저런 얘기를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재밌는 것은 저 때의 운명 같은 기회를 버린 선택과 저 문자가 오히려 이후의 내가 내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재밌는 것은 현재 나는 그때 정신과를 지원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참 예측불허 다이내믹하다. 나는 지금 정신과가 아닌 내 전공과목을 선택하기를 잘했다고 믿는다. 이유는 이렇다. 내가 만약 정신과를 전공했더라면 나는 정신 밖에 모르고 몸을 경시하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정신과라는 과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 성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에만 몰두하여 몸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몸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돼서 공부를 해나가다 보니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몸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몸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됐다. 그렇다고 정신에 대한 내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틈틈이 그 부분을 떠들어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몸과 정신 둘 다 조화롭게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A와 B의 선택에서 선택해야 할 A를 선택하지 않고 B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A와 B를 다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과를 공부하는 것과 전공하는 것은 다르다. 임상의는 환자를 대해야 한다. 그것은 정신을 연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서 사람에 따라 고역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항상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방식으로 선택해 왔다. 마치 투표할 때 A 정치인이 싫어서 관심도 없는 B에 투표하듯. 나는 이런 방식이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만큼은 최악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방식의 선택은 점차 내 존재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없고 타인이 된다.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쯤에는 돌이킬 수도 없다. 이미 이룬 게 많아 포기하면 잃을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상해야 한다. 사치와 향락이든, 아니면 남들 보기 고상한 그럴듯한 취미이든. 지금껏 쌓아놓은 사회경제적 위치를 버릴 수는 없으니, 대신에 내 잃어버린 삶을 쾌락이나 남들로부터의 인정 등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다 좋은 것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당장은 좋아 보여도 나중에는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약 중독자가 지금 마약이 하고 싶다고, 하고 싶은 것에 충실한 게 맞는 건가?

반대로 운동선수가 대회를 한 달 앞두고 연습이 너무 힘들다고 하기 싫은 느낌에 충실해 연습을 관두는 건 맞는 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 때문인지, 그 하고 싶음이 내적인 자아실현 욕구인지, 아니면 단순한 욕망인지 구분해야 한다.

하기 싫은 일의 경우 왜 하기 싫은 건지, 자기 자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하기 싫은 것인지, 혹은 자기가 마땅히 극복해야 할 어떤 장애물이 두려워 방어기제로서 하기 싫은 건지.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시 구절이 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구절.



행복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나니



하기 싫음이 두려움에서 온 것일 수 있고, 이 두려움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 혹은 자아를 실현하고 성장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관문일 수 있다. 만약 내가 20층을 걸어 올라가야만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나는 고소공포증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면 나는 계속 1층에 머물며 20층을 쳐다만 보고 탄식하고 살아야 한다. 물론, 1층에서 죽을 때까지 만족하고 사는 방법도 있다. 아무런 도전도 없이 말이다. 


행복은 언제나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고, 심리학자의 말로는 두려움은 거의 대개 몰라서 생긴다고 한다. 누구나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두려워 안 하다가 막상 하고 나니 '어라 이거 별거 아니네 내가 왜 진작 안 했지?' 이런 경험. 두려우니 피하고, 피하니 모르고, 모르니 또 두렵고, 악순환의 고리는 끝이 없다.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나는 희망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망의 등 뒤에는 대개 절망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은 절대로 용기를 밟고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희망보다는 용기를 더 믿는다. 용기 있게 일어나자. 터무니없는 낙관주의가 아닌 현실적 낙관주의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스톡데일 패러독스처럼 말이다. 


그래 그럼, 최악의 선택은 그렇다 치고 최선의 선택은 뭔데? 선택이란 항상 뒤따르는 결과를 기꺼이 감당할 때에만 좋은 선택이 된다. 그래서 A와 B 둘 중 뭐가 득이냐 해가 되냐를 따지는 합리적 선택 만이 최선선택이 아니라, A든 B든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에 미련을 두지 않는 선택,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합리적인 판단은 항상 해봐야 한다. 이성을 놓으면 사람이 아니니까.


A를 선택하고 믿고 확신하고 나아가면, 중간에 힘든 일이 있겠지만, B에 미련을 두지 않고 확신하고 나아가므로 어떻게든 극복하려 할 것이고 이 가운데서 나 자신이 성장하고 심지어 최후에는 B까지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든 선택했다면 선택하지 않은 쪽에 미련을 두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



어쩌면 아침에 이 글을 보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발행한 것을. 이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닌가? 최선의 선택이길 바랄 뿐이다.



힘든 날이 늘 그렇듯 목이 뻐근한 밤이다.

맨날 앉아 일하느라 목이 뻐근한 분들을 위해 다음 링크를 첨부하니 참고해서 목을 풀면 목도 머리도 시원한 하루가 되리라 믿어본다~~!!!!!!





https://blog.naver.com/tillisee2/22357507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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