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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운 Nov 18. 2021

50년 전 태일이가 지금의 태일이들에게

대구 중구 남산동 50번지에서 온 편지


과거의 내가 전태일을 떠올릴 때 보통 두 가지를 떠올렸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투쟁한 노동운동가로서의 모습이 첫 번째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두 번째였다. 이렇듯 전태일은 나와 우리에게 어떤 상징적인 인물로서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지난 11일 '태일이' 언론배급시사를 통해서 만나본 전태일은 내가 그간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홍준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애니메이션 '태일이'에서 전태일은 지금의 20대 청년과 다르지 않았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길 원하고,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든든한 장남으로 역할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그랬다.

홍준표 감독은 전태일을 열사 이미지만이 아니라 평범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는 "전태일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에 대해서 다뤄야 하는데 저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세대로서 많은 부담감이 있었다"며 "하지만 시나리오를 받고 더 많이 알아보니까, 단지 우리가 전태일에 대해 어떤 열사 이미지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그래서 전태일을 20대 초반, 우리와 비슷한 동료의 태일이로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제 세대가 이야기를 하면 다음 세대에게도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아버지에게 술안주 사드시라고 힘들게 번 돈을 쿡 찔러드리거나, 친구와 도시락을 먹는 모습, 차비를 아껴서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모습 등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노동환경은 전태일을 평범한 청년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태일은 여동생 같은 공장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기침과 피를 토하고, 심지어 제대로 된 노동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태일은 사람답게 일하고 싶었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노동하고 싶어 했다.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스스로 산화를 선택한 태일이의 모습보다, 골목 한 어귀에서 휘발유 통과 라이터를 들고 고민에 빠진 태일이의 모습을 조금 더 오랫동안 비춘다. 태일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람답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가장 가슴이 아팠던 장면이었다.

'태일이'를 취재하기 사흘 전(7일) 또 다른 취재를 다녀왔다. 여수 특성화고 실습생 고 홍정운 군을 추모하는 거리행진이었다. 이날은 홍 군이 사망한 지 딱 한 달이 된 날이었다. 홍 군의 친구들, 지역 곳곳 특성화고 재학생 및 졸업생, 교사, 시민들 90여 명은 홍 군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시청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청와대까지 행진을 했다.

행진하는 동안 살아생전 홍 군이 좋아했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가수 경서가 부른 '밤하늘의 별을'이라는 곡과 가수 스탠딩에그의 '오래된 노래'였다. 특히 '밤하늘의 별을'이라는 곡에는 홍 군의 목소리도 함께 담겨 있어서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홍 군은 지난 10월 6일 여수에 위치한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 일환으로 요트 아래 따개비를 따는 작업을 하다가 사망했다. 물 아래에서 작업하던 홍 군은 잠수 장비 정비를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산소통, 오리발을 벗던 와중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홍 군은 12kg에 달하는 웨이트 벨트를 먼저 벗어야 한다는 교육 등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인 1조, 업무 적응 기간 등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개비 따는 작업도 홍군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홍 군이 학교에서 노동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실제 이날 모인 특성화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학교부터 노동교육을 제도화하라'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학생들도 노동자로서 당당한 권리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권리를 배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이날 만난 특성화고 학생들은 이런 이야기도 해줬다. "현장실습생을 학생으로만 보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로서의 모습을 봐주지 않아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에게도 노동자 성을 보장해 줘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른들이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아이들은 힘을 모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자기 요트를 갖는 게 꿈이었던 홍 군은 왜 자신의 꿈도 이루지 못하고 현장 실습을 나가서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그 꿈을 뺏은 것은 누구일까. 50년 전 태일이의 외침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사그라지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 때문일까. OECD 산재 사망률 1위인 나라. 그 무거운 딱지를 등에 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정말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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