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 성가반주 할 수 있어요!!!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세상이다. 오르간이란 악기를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다치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연주해 주시던 악기가 내가 알고 있던 오르간이었다. 피아노와 같은 모양과 개수의 건반을 눌러주고 발로 2개의 페달을 밟아주면 힘겹게 소리를 내어주던 그 오르간.
레슨 선생님 집에서 오르간을 목격하면서 나는 새로운 고난과 도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초등학교 때 본 그 오르간은 풍금이란다. 내가 배워야 하는 건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거대한 악기다. 건반만 해도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1단만 있는 피아노에 비해 이 오르간은 2단 또는 3단이 있고 5단이나 있는 것도 있다. 페달에도 건반이 있다! 오르간 의자에 앉기 위해 페달을 밟고 지나가는데 각기 다른 음색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놀라버렸다. 스탑 (stop)이라는 것이 있어서 오르간 외에도 리드, 플롯, 비올라, 하프시코드, 아코디언 같은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고 피아노보다 훨씬 넓은 음역을 갖고 있다. 연주자가 적절하게 조작해서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들을 등록 (registration) 해 놓는 기능까지 있다고 한다.
오르간을 배워서 성당에서 전례봉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다.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새로 옮긴 성당의 성가반주자이다. 임시로 살게 된 동네에서 저녁 미사를 나가고 있다. 청년부 미사이다 보니 전례 봉사자들이 대부분 학생들이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성당으로부터 멀어진 두 딸들을 생각하면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특히 전례봉사까지 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기특하기만 하다. 성가 반주자들을 탓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이유 때문에 오르간 앞에 졸지에 앉게 된 아이들이 연주하는 성가 음률을 듣는 건, 또 그 반주에 맞춰서 성가를 불러야 하는 건 매우 곤욕스럽다. 꽤 큰 서울중심부의 성당임에도 성가반주자가 이렇게 부족한 형편이다. 어린 시절에 배운 피아노실력이지만 오르간 레슨을 조금만 받으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하고 레슨선생님을 구했다.
첫 레슨을 받고는 내 능력을 벗어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단 나는 오르간이란 악기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성당에서 사용되는 오르간은 피아노나 풍금과는 완전 다른 악기였다. 그 많은 건반들과 기능들을 이 굳어진 머리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것은 앞으로 엄청난 좌절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스트레스받을 일이나 사람은 피하고 살기가 인생 후반기를 사는 나의 모토다. 조금만 머리를 쓰고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짐작하고 시작했는데 완전 계산 착오였다.
거기에다 연주기법도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르다. 모든 음을 레가토를 시켜서 연결해야 한다. 왼손 오른손의 각각 다섯 손가락만으로는 아무리 늘려봐도 여러 옥타브의 모든 음을 연결시킬 수는 없다. 손가락을 재빠르게 바꾸기,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다음 음을 연결하기, 손가락번호를 정확하게 지키기... 등등의 기법들을 익혀야 한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던 어렴풋한 기억만 믿고 악보는 읽을 줄 안다고 믿었는데 머리가 부정한다. 침침한 눈으로 5선의 줄과 칸을 하나하나 세고 샵과 플랫 자리를 따져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굳어진 손가락과 손목은 힘만 잔뜩 들어갈 뿐 올바른 터치조차 못하고 있다.
첫 레슨 날 도저히 내가 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을 선생님께 표현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본분을 다 하느라 ‘할 수 있다!’라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셨다. 레가토연습, 두 음을 동시에 냈다가 한 손가락은 띄는 연습, 그리고 성가 2개의 악보를 읽어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셨다.
‘일단 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달리기도 하는 내가 아닌가!라고 주문을 외웠다. 손톱부터 짧게 깎았다. 오르간이 없으니 피아노 앞에 앉아서 숙제를 시작했다. 굳어진 손가락이다 보니 레가토로 한 음과 다음 음을 연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두 손가락을 동시에 눌렀다가 한 손가락만 떼야하는 건 손가락도 문제지만 머리가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왼손 오른손을 따로 하는 것까지는 용량이 되는데 두 손가락을 동시에 하면 과부하가 걸려서 아무 손가락이나 떼고 있다. 성가곡 악보 읽기는 더 처절하다. 일단 모든 음마다 손가락 번호를 적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사용하고 났는데 연결해야 하는 다음 음들이 계속된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겨우 한 곡의 손가락 번호 적기가 끝났다. 두 시간 정도를 들여 첫날의 숙제를 끝내고 나니 서글퍼진다. 오기도 생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주일 동안 연습을 했다. 어제 한 건데도 오늘이 되니 완전히 새로운 걸 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두 번째 레슨 때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또 선생님의 본분을 다해 칭찬해 주셨다. 연습 잘해왔다고, 꼭 성가 반주자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신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한 한계 한 단계 하다 보면 페달의 건반도 연주하고, 스탑도 사용하고, 건반의 swell과 great도 구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registration에 나만의 성가곡을 저장해 놓을 수도 있겠지. 손가락번호를 써놓지 않고도 레가토로 매끄럽게 한 곡을 연주할 수 있겠지. 갑자기 성가 반주자가 필요할 때 ‘제가 할게요!’라고 손들 수 있겠지. 1년 3개월 전에 내가 5킬로미터를 달리고 10킬로미터 마라톤에 참가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내 인생에 멋진 일은 자꾸자꾸 생겨날 수 있다. 두렵고 힘들더라도 내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