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후반 여자들이 모이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그룹과 전문직을 갖고 살아온 그룹의 대화 내용은 다를까? 자기 관리를 잘해서 외모가 젊어 보이고 아직 아름다운 그룹과 가족을 위해 희생적인 삶만 살아온 그룹은 서로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을 할까?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만나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일곱 명의 그녀들이 연말 모임을 가졌다. 유학생이었거나 유학생 아내였기에 배울 만큼 배웠고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오면서 가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대화는 지난 몇 달 동안 몸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아팠고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를 보고하고, 동병상련을 느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다음은 정보교환이다. 어떤 병원의 어떤 의사가 명의이며 그들이 어떤 약과 어떤 치료 방법을 알려줬는지를 이야기한다. 급기야는 그날 아침에 누군가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약을 꺼내 보이고 그 약의 효능과 부작용까지 토론하는 단계까지 갔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우리 1시간 반 동안 아픈 이야기만 나누었어! 주제 좀 바꾸자!” 약병을 들었던 누군가의 손이 슬며시 내려지는 그 순간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서글픈 웃음이었지만 달관한 웃음이기도 했다. ‘이 나이를 받아들여야지, 우리라고 별 수 있나’
주제를 바꾼다는 게 이번에는 운동이야기이다. 누구는 하루에 만보 걷기를 하고 있었고, 라인댄스와 줌바댄스를 하는 사람, 요가나 필라테스를 하는 사람, 피트니스클럽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는 사람 등등 열심히 사는 그녀들답게 모두들 무언가는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한 사람이 수줍어하면서 나에게 스마트폰의 한 앱을 열어 보여주었다. 달리기를 도와주는 ‘런데이’라는 앱의 ‘30분 달리기 도전’ 프로그램이었고, 8주 24회의 모든 훈련을 완수했다는 출석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앱을 소개했었는데 푸른색의 출석도장이 완벽하게 채워진 것을 보여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교수라는 본업 이외에도 하는 일이 많았던 그녀는 늘 잠이 부족하고 피곤하며 지병으로 인해 얼굴과 몸에 부종이 있었다. 그런데 몸이 전체적으로 슬림해졌을 뿐 아니라 얼굴의 부기가 싹 빠져있고 피부톤이 맑아 보였다. 달리기 한 이후로 꿀잠도 자고 있으며 피곤함도 덜 느낀다고 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녀의 변화된 외모를 칭찬했다. 모두들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 건 달리기를 시작한 그녀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한껏 고무된 나는 ‘간증’을 시작했다. 달리기가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주었고 어떤 나의 나쁜 습관을 없애주었는지를. 다음 모임 때에 또 다른 누군가가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야기는 아로마 세러피로 흘러갔다. 아로마 테라피스트 자격증을 소지한 한 사람이 아로마 세러피란 ‘향기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라벤더, 오렌지, 페퍼민트, 로즈메리, 레몬, 장미 등의 식물의 고유 성분을 추출하여 얻은 에센셜 오일은 식물의 종류에 따라 성분도 다르고 효능도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체내의 독소와 노폐물을 정화시키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소시키며, 숙면에 도움이 되고. 기억력과 집중력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몸의 한두 군데는 고장이 나있고, 아직도 갱년기 스트레스를 겪고 있으며, 불면과 경미한 치매 증세까지 보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좋은 만병통치약에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항상 소지하고 다닌다는 아로마 키트를 열어 몇 가지 오일 체험을 시켜주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방울을 떨어뜨려 혀에 넣어 굴려보기도 하고 어깨와 목 등 몸 곳곳에 발라보니 입과 코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도 같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 같고, 결리던 어깨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아서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인생의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아줌마들이지만 의심을 거두고 마음을 활짝 열어 향기에만 집중하니 즉각적인 효과가 발휘되는 기적이 발생한 모양이다. 그녀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정기적인 아로마 세러피 강좌를 급조해서 첫 강의날까지 정하고서야 이야기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날 이야기의 마지막 주제는 ‘성경공부’였다. 한 사람의 원불교도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교회나 성당을 다니면서 하느님을 믿고 있다. 미국에서 타향살이를 할 때 매주 금요일 낮이면 현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목사님 따님의 집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비빔밥이나 국수를 나누어 먹으며 이방인의 서글픔을 달랬었다. 천주교도인 나는 그때 개신교나 천주교가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는 성경공부를 함께 해나가면서 서로 오해했던 부분을 풀고 서로의 교리들을 이해했었다.
한국에서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 경험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성경공부를 다시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오프라인으로는 정기적으로 매주 만나기 어려우니 Zoom을 통해 온라인으로 해보면 어떻게냐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오갔다. 성경공부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의 긴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30대 초반에 처음 만났던 우리는 그때는 아이들 이야기만 했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는 잘 늘고 있는지, 좋은 초등학교에 갈 수 있는 학군은 어딘지 (백인 중산층이 모여사는 학군이 좋은 학군이었다), 어느 축구팀에 들어가야 하는지 (미국 유초등부의 많은 아이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축구팀에 가입되어 있다,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미국 팀이 한 번도 4강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다), 친구들 생일파티에 초대는 받았는지 (미국의 생일파티는 엄마와 아이에게 큰 행사다), 좋은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생님은 누군지, 한글공부는 어떻게 시켜야 할지... 등등의 고민을 나누다가 급기야는 엄마들끼리 품앗이를 해서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고 영역을 정해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40대에도 역시 아이들 진학, 입시가 주 관심사였고, 집을 사고팔면서 누가 얼마를 벌었다더라 하는 무용담도 나누었고, 사춘기 아이들, 무관심한 남편, 이해할 수 없는 시댁 식구들 이야기를 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50대 중반까지는 여전히 아이들과 남편 소식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이 어떤 대학에 진학했고 어디에 취직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결혼계획은 있는지, 남편은 여전히 현직에 있으면서 중요한 직위까지 올라갔는지 아니면 조기은퇴를 했는지.. 등등이 대화 주제였다.
50대 후반인 지금은 아이들과 남편이야기가 쏙 빠졌다. 대신에 본인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 자신의 건강과 취미에 대한 이야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느낀 이야기, 종교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경험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좋아. 내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야!’
20~30 대에는 50살 이상의 여자로서의 내 인생을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생리가 멈추고 여자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그 빛나던 젊음과 미모는 사라지고,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는 우울하고 괴팍한 노파가 되어버린다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현재 50대 후반인 우리들은 지금이 가장 좋다고 외치고 있다. 자기 위안이나 자기 연민에서 나온 소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내 몸과 마음이 안녕한지 집중해서 살피고, 내 갱년기는 건강한지 체크해서 부족한 호르몬이 있으면 보충해 주고, 마음이 통하고 만나서 행복해지는 사람만 만나고, 그런 모임에만 참석해도 되고, 하루 24시간을 나만을 위해 쓸 수 있고, 아직은 건재한 무릎과 발목이 있어서 달리기를 할 수 있고... 무엇을 더 바랄까.
[백 년을 살아보니]를 펴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에서 ‘살아보니 60~ 75세가 인생의 황금기였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 황금기가 90세 까지도 연장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환갑 이후의 삶은 또 안 가본 길이라서 만족스럽고 행복할지의 여부를 자신할 수가 없다. 진짜 노인이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백세 이상을 살아본 인생 선배들이 60대 이후에도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을 하니 기대가 되기도 한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후반전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