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복지법 제58조는 장애인복지시설의 종류와 기능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은 장애인 지역사회재활시설로 전담 사회사업가가 입주자의 생활을 지원하는 지역 기반의 생활주택입니다. 21더숨 역시 이러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성 장애인들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그중 혜지 씨의 첫 단독 여행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과 남긴 의미를 다루고자 합니다.
세 모녀가 이어온 삶의 호흡
혜지 씨의 본가는 진주입니다. 어머니는 진주에, 언니는 파주에 살고 있습니다. 세 모녀 모두에게 청각장애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함께 살지 못했던 시간의 단절은 있었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두 달마다 만나 지역축제를 함께 즐기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단순한 가족 여행이 아니라, 떨어져 지낸 세 사람이 서로의 삶을 확인하고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본가로 향하는 길에는 늘 설렘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혜지 씨에게 소중한 정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푸바오’를 향한 확고한 마음과 갑작스러운 선언
혜지 씨에게 에버랜드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판다 ‘푸바오’를 사랑해 마지막 귀국길까지 배웅하러 다녀올 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원래는 세 모녀가 지역축제에서 만날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되자, 혜지 씨는 21더숨 톡방에 갑자기 이렇게 올렸습니다.
“에버랜드로 1박 2일 여행 갈 거예요. 숙소는 찜질방.”
전담 사회사업가는 즉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이동 동선과 시간표를 함께 점검했습니다. 찜질방 숙박은 위험할 수 있어 호텔을 안내하고 예약을 도왔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혜지 씨의 의지였습니다. 지원 과정 내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 혼자 가고 싶어요.”
그 말은 보호의 눈으로만 해석해선 안 되는, 자기 삶의 통제권을 향한 요구였습니다. 복지 현장에서 종종 마주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톡으로 이어진 길, 그리고 스스로의 이동
여행 당일, 기차는 11시였지만 혜지 씨는 아침 8시에 이미 역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낯선 공간에서 실수할까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일찍 행동하는 그녀만의 방식입니다. 수원역에 도착한 뒤 용인으로 이동하는 환승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만, 청각 정보 이용이 어려운 그녀에게는 특히 도전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혜지 씨는 톡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사회사업가는 지도를 보며 이동 경로를 하나씩 설명했습니다. 여러 번의 왕복 메시지, 세밀한 안내, 몇 번의 실수와 수정 끝에 혜지 씨는 예약한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문 닫는 시간까지 에버랜드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전 일찍 입장해 좋아하는 동물들을 만나고, 정해진 시간까지 머물렀습니다. 돌아오는 길의 환승은 더 복잡했지만 다시 안내를 받아 차근차근 이동했고, 결국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여행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는 익숙한 미소와 다른 감정으로 환했 보였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다음 날,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피곤해요. 하지만 또 여행 갈 거예요.”
지원은 대신함이 아니라, 가능하게 함이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 어려움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혜지 씨는 그저 다른 누구처럼 꿈꾸고, 준비하고, 부딪히고, 해결하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현장에서 나는 ‘자립’에 대한 오해를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자립은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능력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
이 선택권은 안전한 제도, 신뢰할 관계,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구조에서 자라납니다. 그 힘을 키우는 경험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단단하고 주체적으로 만듭니다.
사회복지의 역할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그 가능성을 넓혀주는 일입니다.
혜지 씨의 1박 2일 여행은 그 사실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준 장면입니다.
조금 느리게 걸어도 괜찮습니다. 더 많은 점검이 필요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해보는 경험이 한 사람의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속도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복지의 방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