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손주는 어른들의 휴대전화를 다 사용합니다.
놀라운 건 그 비밀번호가 무엇이며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할머니에게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에게는 조심스레,
작은 엄마에게는 애교 섞어.
작은 아빠에게는 당당하게,
그리고 부모에게는 아예 자기 물건 쓰듯이.
우리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손주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편하게 다가가면 되고 누군가에게는 조심스러운 문장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집은 아홉 명이 삽니다.
남편과 나, 큰아들네 부부와 아이 둘, 둘재 아들네 부부, 그리고 막내아들
성격도 다르고 생활 리듬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은 언제나 시끌시끌합니다.
하지만 그 소란에서 우리는 서로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며 묻고 부탁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만들어지는 온기가 있습니다.
그 중심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 둘째 손주가 있습니다.
우리 집의 막내이자 누구보다 재빠르게 분위기를 읽는 전략가, 아이는 이 큰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사람을 배우고, 표정을 읽고, 언어를 골라 쓰는 법을 익혀 왔습니다.
대가족은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사회가 되고, 학교가 되고, 관계의 연습장이 되었습니다.
손주를 보다 보면 다른 삶의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때때로 멀게 혹은 복잡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적응도 '스스로 다 해내어야만 한다'라는 의지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속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관계, 기대어도 괜찮은 공동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손주가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의 기술'을 배웠듯, 누군가에는 함께 있는 환경 자체가 세상과 이어지는 다리가 될 테이니까요.
여럿의 시선이 한 사람을 지켜보고, 서로의 하루가 자연스레 겹치는 집. 누군가는 웃음을 주고, 누군가는 지혜를 나누고, 누군가는 말없이 곁을 지킵니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완성하는 우리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손주는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방식을 익혀 가고 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은 그 사람의 의지보다도, 그를 둘러싼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오래된 진리를, 손주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삶의 기쁨을 나누고 배우는 힘은 언제나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압니다.
관계의 힘이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함께 사는 법을 익힌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 안의 가장 은밀한 곳을 들여다볼 용기를 얻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끔 예고 없이 잔잔한 물결을 만드는 호수 같습니다. 아무 일 없던 하루에도, 오래된 기억의 미세한 흔들림이 스며오면 나는 그 물결을 붙잡으려다 살며시 젖어 버립니다. 숨기고 싶던 마음이 들켜 버린 듯 당황스럽지만, 그 감정들도 결국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지나온 물길이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큼 다정해집니다.
살다 보면 빛처럼 스치는 순간, 따뜻하고 짧고 설명할 수 없는 선명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금방 사라지지만 자꾸 돌아보게 되는 그 빛은 이상하게도 하루를 버틸 힘이 됩니다. 마치 ‘괜찮아질 거야’하고 건네는 따뜻한 온기처럼, 닿지 않아도 느껴지고, 붙잡지 않아도 흐르는 것, 그런 것이 오래 마음을 데웁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는 건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어느 날엔 그 사람의 이름이 바람처럼 스며들고, 어느 밤엔 창가 불빛 하나가 괜히 마음을 흔드는 정도일 뿐. 모호하고 흐릿해 보여도 그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가 있습니다. 그 온기는 내가 종종 잊고 살던 ‘살아 있음’의 감각을 되돌려 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안의 작은 호수를 들여다봅니다. 흔들리는 물결이 있다면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려 합니다. 사랑이든, 그리움이든,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든, 이런 마음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이 조금 더 단단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한 날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