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갈등, 그 경계를 넘지 못한 결혼
-오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길상이 힐끗 쳐다본다.
-헌병 장교 이와사키의 처가 김두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어떻게?
재빠른 반응이 나온다.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면서 얘기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 했소.
-한번 오라고, 부친 얘기도 있으니까 만나거든 그리 전하라 했습니다.
-잘했소.
길상은 빙그레 웃는다. 서희는 한숨을 깨물고,
-저문데 주무시지요.
-그럽시다.
토지 2부 4권 p. 162
이 장면에서 서희와 길상은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서로의 마음을 숨기는 이유는 시대적,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인 요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유교적 가치관이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시기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결혼은 주로 가문과 사회적 안정성을 위한 결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감정적 갈등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서희와 길상은 이러한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여, 대화 속에서 감정을 숨기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한다.
두 사람의 성격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희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길상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길상 역시 내면의 불안과 갈등을 표현하지 않으려 하며, 아내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이들이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 태도는 결국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갈등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장면은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감정 표현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길상과 서희의 관계는 단순한 결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결혼은 전략적이고, 신분을 넘지 못한 경직된 결합처럼 보인다. 서희는 어릴 적부터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 부를 쌓아가는 여인이다. 그 어떤 자리에 놓이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그녀는, 결국 자신을 돌봐줄 남자로 김길상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단순한 애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 없이 살아온 서희에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를 보호와 안정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했고, 김길상은 그런 서희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들은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서희는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꾸며 복수를 위해 살고, 길상은 자신이 얻은 사랑이 온전하게 자신을 채우지 못한다는 불안에 휘말린다. 서로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이들의 관계는 결혼 전보다도 더욱 멀어진다. 왜일까?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면의 갈등과 자신만의 틀에 갇혀 있어서 결국 그 마음이 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애정'이라는 감정이 그들의 삶에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희는 김길상과의 결혼을 전략적으로 결단했다. 그 결혼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합이라기보다 각자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길상 역시 서희의 사랑을 얻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있으며, 결국 이들 사이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틈이 존재하는 듯하다.
길상과 서희의 결혼은 보편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고뇌와 번뇌 속에서 자신을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서로의 내면에서 존재하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고통과 고뇌를 동반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여정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들의 결혼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단순히 감정적인 결합만이 아니라, 각자의 불완전함을 채우려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길상과 서희의 관계는 결국 인생에서 우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처럼,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결혼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갈등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각자의 내면에서의 싸움과 성장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단순히 긍정적이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그리는 대하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 변화와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한다.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중요한 메시지는 완전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작중 인물들 중에서 월선은 상대적으로 선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 역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다른 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기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인간이 모두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김평산과 그의 아들 김두수는 성악설을 뒷받침하는 인물들로, 그들의 행동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한 인물 군상은 단순히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예측할 수 없는 양상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묵묵히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