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질문이 먼저다
나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력을 가졌다.
아프리카 지역학을 전공했고, 꽤 오랫동안 진지하게 외교와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준비했다. 청년 대표로 국민의사당에서 민주당원들과 아프리카를 공부했고, 정부 전액 지원으로 에티오피아의 아프리카 연합(AU)와 케냐를 다녀왔으며,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커리어는 외교나 국제기구나 NGO 쪽으로 흘러갈 거라 믿었다. 그러나 현장에 나가 보면 늘 같은 문제들이 반복됐다. 데이터 정리에 열흘, 웹사이트 하나 만드는데 두 달. 너무 많은 일이 수동적이었고, 중요한 문제는 늘 뒷전이었다. 그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그 인력이 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우연히 테크라는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무작정 뛰어든 자리였지만, 어느새 4년 반이 지났다.
PM으로서 꽤 많은 프로젝트를 이끌며, 나는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품게 됐다. AI가 발전하고, 일이 경계와 국경을 잃어가는 시대 속에서: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기술 속에서, 정말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항상 사람으로 돌아온다. 기술보다 앞서 있는 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사람이다. 모든 프로덕트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결하고 싶은가?"에서 출발한다.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채 최신 기술만 따라가는 개발은 결국 금세 소모되고 만다. 내가 이 시점에서 아프리카를 전공했던 이유, 아프리카를 넘어 저자원 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이나믹한 상황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과 닿아 있었다.
여전히 국제개발협력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은 기술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 발 물러선다. 문과생이니까,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술을 안다'는 건 코딩을 배우라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들 때 수십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홍수 예측 시스템 하나만 봐도 위성 데이터 처리, 웹 대시보드, SMS 발송, 번역 시스템 등이 모두 다른 기술이다. 구글이나 팔란티어의 현업 개발자들도 이 모든 걸 다 알지 못한다. 그들도, 나도, 프로젝트마다 새로 공부한다.
그럼 핵심은 뭘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기술들이 필요할지 파악하고, 그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서 팀을 구성하는 능력"이다. 이건 코딩 실력이 아니라 기획력이고 판단력이다.
최근 팔란티어 면접을 6차 중 4차까지 뚫게 되면서, 구글과 팔란티어, 그리고 스타링크 같은 기업들이 미국 외 국가에 어떤 기술을 배포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안에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화려한 AI나 거대한 플랫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인프라가 열악한 현장에 맞춰 기능을 최소화한 솔루션이 대부분이었다. 인터넷 연결 없이도 작동하는 앱, 파편화된 수기 데이터를 자동으로 정리해주는 인터페이스, 엑셀 수준의 로직으로 구현된 보고 시스템 등. 그런데 이 솔루션들의 구조는 실리콘밸리에서 쓰이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단지 해결하려는 '문제'가 달랐을 뿐이다.
구글이 인도, 방글라데시, 케냐에서 운영하는 홍수 예측 시스템을 보자. 문제는 단순했다. 매년 반복되는 홍수 피해에 대해 정부 경보 체계는 느리고, 지역 주민은 실시간 위험 정보를 받지 못한다는 것. 0에서 팀은 솔루션을 구축해야 한다.
�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문제: 매년 반복되는 홍수 피해. 정부 경보 체계는 느리고, 지역 주민은 실시간 위험 정보를 받지 못함.
구글의 접근: 수문학 모델 + 위성 이미지 + 지역 지형 데이터로, 예측 기반의 홍수 알림 시스템 구축.
사용자: 지역 정부, NGO, 주민 (문자 기반 알림 / 정부 대시보드)
구글의 접근은 수문학 모델과 위성 이미지, 지역 지형 데이터를 결합해 예측 기반의 홍수 알림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기술 스택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위성 이미지와 기상 데이터를 ML 모델로 처리하고, 웹 기반 대시보드로 시각화하며, SMS로 현지 언어 알림을 보내는 구조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역할들을 보면 흥미롭다. 정책 PM이 경보 기준을 설정하고 정부와 협의를 조율한다. 예측이 맞아도 '경보를 언제 띄울지'는 결국 정책 판단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 전문가가 메시지 현지화와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설계한다. 경고도 맥락에 맞게 번역돼야 효과가 있다. 그리고 현지 NGO 담당자가 사용자 인터뷰를 하고 영향을 모니터링한다. 기술이 실제로 '쓰이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출한 해결책과 어떤 프로덕트를 만들지 정했다면, 이제 필요한 기능을 정리한다. 이건 혼자 할 수 없다. 실무자들과 많은 소통이 필요하다.
� 기술 스택 및 구성
위성 이미지 + 기상 데이터 → 예측 모델 (ML, GCP 기반)
대시보드: 웹 기반 시각화 시스템 (React, Python backend 등)
SMS 알림 시스템: 현지 언어 번역 포함
다음 차례로는, 팀원들이 필요하다.
� 필요한 역할과 이유
팔란티어가 동남아시아에서 진행하는 재난예산 모니터링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각 부처의 재난 대응 예산이 부정확하거나 중복되고, 중앙-지방 간 정보 공유가 단절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정부 시스템과 연동되는 통합 대시보드를 구축한다.
�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문제: 각 부처의 재난 대응 예산이 부정확하거나 중복되고, 중앙-지방 간 정보 공유가 단절됨.
팔란티어의 접근: 기존 정부 시스템과 연동되는 통합 대시보드 구축, 예산 흐름 + 실시간 사업 진행 상황 시각화
팔란티어 파운드리 기반의 데이터 연동과 로컬 시스템 API 통합, 사업별 KPI 시각화는 기술적으로는 표준적인 BI 솔루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시민사회 연락 담당자가 부처 간 협업을 설계하고 대시보드 설계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기술보다 '정보를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통합 PM은 정책을 기술로 번역하고 요구사항을 정리한다. "정부는 이걸 원한다"를 이해하고 구현 가능하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윤리 담당자가 데이터 사용 범위를 모니터링한다. 정부 데이터는 정치적으로 예민하므로 감시 구조가 필요하다.
도출한 해결책과 어떤 프로덕트를 만들지 정했다면, 이제 필요한 기능을 정리한다.
� 기술 스택 및 구성
Palantir Foundry 기반 데이터 연동
로컬 시스템과의 API 통합
사업별 KPI 시각화 (GIS 포함)
다음 차례로는, 팀원들이 필요하다.
� 필요한 역할과 이유
결국 실리콘밸리의 PM이 하는 일과, 나이로비의 NGO 실무자가 하는 일의 본질은 같다는 것을. 문제를 정의하고, 가장 적절한 기술을 골라, 누구와 어떻게 쓸지를 판단하는 일. 이건 기술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술을 결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결정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코딩 언어나 수학 모델로만 이해하지만, 현장에서 정말 중요한 건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의 문해력, 인터넷 사용 습관, 정부 정책, 문화적 터부, 일하는 조직의 방식 — 이 모든 맥락을 동시에 읽고 그 안에서 작동 가능한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 이건 오히려 문과생, 지역전문가, 정책기획자들이 가장 잘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한국의 디지털 교육 현장은 이 출발점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최근 정부가 지원하는 데이터 분석 교육 프로그램에서 특강을 맡게 되어 여러 기관의 부트캠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 불안해 보였다. 왜 공부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자기가 뭘 해결하고 싶은지 모른 채 그저 '기술을 배우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감각으로 앉아 있었다.
문제는 교육 구조 자체가 이런 상태를 강화한다는 점이다. 기술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커리큘럼이 새로 만들어지고, 교육기관들은 정부 예산을 받기 위해 최신 기술 위주로 과정을 설계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문제 의식, 산업 이해, 자기 성찰 없이 바로 실무 기술을 배운다.
이는 방향 없이 깊이만 강요하는 구조다. 학생들은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은 익히지만, 그 기술로 해결할 가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단기적 실무 능력에만 집중하게 되어 장기적 관점에서 기술의 목적과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다.
순서는 거꾸로여야 한다.
먼저, 내가 무엇을 풀고 싶은지. 그다음, 이 사회에서 그 문제가 어떤 구조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에야,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것.
모든 프로덕트의 시작은 "우리는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가"다. 그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테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
결국 테크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왜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가 그렇게 많은지를 감각적으로 아는 사람이 테크에서 더 멀리 간다. 기술은 완성된 무기가 아니라, 문제의 정의 없이는 공허한 도구다.
기술은 그저 그것일 뿐이다. 그걸 쓰는 사람의 결심, 시선, 질문이 있어야만 처음으로 의미를 가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