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매니저 현직자의 통일성 없는 이력서를 돌아보며
작년부터 프로젝트 매니저로 회사에서 활약한 지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스물다섯이 되었다. 사람들은 대학시절 내 전공을 자주 묻곤 하는데, 나는 현재 일하는 IT 업계와 전혀 관련 없는 국제개발협력, 아프리카 지역학을 공부했었고 (그것도 굉장히 열심히)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일 것이다.
대학시절 전공은 어려서부터 간절히 공부하고 팠던 분야라서 정말 열심히 했었고 덕분에 전문가 타이틀도 얻었다. 아직 관련해 도움을 구하는 이메일을 받기도 하고, 언젠가 그 분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현장서 일하시는 분들과 인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대학을 가기 전까지 초중고를 졸업하지 않고 집에서 공부한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경력을 어떻게든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는 여성가족부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자퇴생들 수를 인지하고 교육적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을 만들기 훨씬 전이었다.
지금은 각 시의 청소년 수련관에서 자퇴생들을 위해 검정고시/방과 후 교육을 제공하고 선생님을 붙여준다고 들었다. 내가 대학을 가기 전에는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일반 공모전이나 스피치 콘테스트 등에 도전하는데 제약이 있었고, 선생님을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없는 길을 개척해야 했다. 공모전 행정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설득한다던가 등등의 노력이 수반되면 대부분 안 되는 경우는 없었다.
경력을 쌓을 수 있는 학교라는 창구가 없으니 학교 바깥에서 활동을 찾아다녀야 했다. 내가 자란 고향 강릉은 내가 기억하기론 올림픽 전에 황무지고 폐허였다. 아무것도 없는 정말 깊은 시골이었고 현재 관광지로 부상하여 도시처럼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엄청난 기적이다.
그렇게 도시가 발전하기 전으로 돌아와; 시골에서 나 같은 학교 밖 청소년에게 교육적 기회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아르바이트, 자원봉사 등은 닥치는 대로, 최대한 많이 한 것 같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배경이 모두 극과 극으로 달랐다. 나보다 나이가 정말 많았거나, 정말 적었거나였다. 그래서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내 또래를 만난 적이 많이 없었다.
어른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회화 동아리를 만든 적도 있다. 포스터를 만들어서 강릉에 가장 큰 도서관 중 '모루도서관' 행정 사무실로 가지고 가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었다. 직원분들이 정말 감사하게도 뭘 해보겠다고 나서는 꼬맹이가 대견했는지 도서관 벤츠 끌고 강릉의 도서관, 마을협회 등을 다 돌아다니시면서 포스터를 여기저기 돌리는 걸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크고 작은 공모전도 다 도전해서 상을 많이 탔었고, 그런 경험들이 하나씩 모이다 보니 내 경력서는 통일성이 없는 대신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대학에 지원할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자퇴생의 경우 서울 재 대학에는 수시 지원이 불가하고 수능 성적만으로 지원할 수 있다. - 지금도 유효한 정책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 경험들이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어느 그룹/환경에 가도 잘 적응하게 되었고, 경험이 많다보니 어떤 분위기와 생각이 나라는 사람에게 잘 맞는지를 일찍 알았다.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지만 스며들지 않고 내 가치관은 잘 지켜낼 수 있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사회에 나와서 직장생활을 하며 실제 써먹을 수 있는 부분과 내 과거의 경험이 많이 접목됨을 깨달았기 때문일 거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이런 다채로운 경험을 하길 선호했고, 다른 친구들은 전공과 잘 맞는 대외활동을 선택할 때 나는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골라했다. 그렇게 IT 업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지금까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발판이 된 경력 몇 가지를 소개한다.
18살 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대학 입학 전에 그만둔 대외활동이다. 유럽 청소년들이 만든 비영리 단체 조직으로, 인터넷 서칭으로 찾아 지원서를 보내 합격하고 활동을 시작했었다. 오프라인으로 활동하기에 체계적으로 잘 조직화되어 있고, 10대들이지만 훌륭한 기자들이 많았어서 나도 재밌게 활동했었다.
한국 관련기사 콘텐츠를 영어로 작성하면, 영어가 모국어인 유럽 출신 에디터들이 글의 전달성, 문법을 수정하여 출판한다. 매주 타국가 기자들과 국제정세 온라인 모의토론을 통해 기사 초안을 잡는다.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이 '위안부'를 주제로 기자를 내었으나 사실과 무근하다는 일본 기자들의 반박에 출판이 늦어진 경험이었다. 그때 한국에 영화 '귀향'이 막 개봉했던 터라 이걸 주제로 간절히 쓰고 싶었어서, 중국, 베트남 기자들의 연락처를 받아내어 이메일로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렇게 연락한 기자들이 에디터들에게 직접 연락하여 관련 자료 링크의 사실성을 입증하여 겨우 출판시켰다.
단체를 설득하려면 단체 내부 상당한 수의 팀원들, 혹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팀원들을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 혼자 팩트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추진하는 건 아주 가끔, 아주 가끔 먹힌다 (아닌 경우도 물론 있다).
상사의 허락이나 도움 없이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열정으로 많은 걸 개혁하고 싶어 하는 사회초년생 입장에선 현실의 잔인함에 쉽게 실망하곤 하는데, 이 원리를 알고 사용하는 게 직장 생활에서 내 뜻대로 뭔가를 추진할 때 더 도움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했던 활동으로, 5명의 팀을 꾸려 실행할 프로그램 기획안을 작성하면, 보건복지부에서 심사한 후, 지원금 50만 원을 지원하는 성과위주 대외활동이었다.
학생 때의 성관계를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로 낙태가 선택되고 여성의 육체/심리적인 건강도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가 맘에 들어서 시작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Safe sex (안전한 성관계)'를 위해, 성에 대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거다.
그냥 보건복지부에서 캠페인을 진행할 때 나눠줄 사탕, 팸플릿 등을 박스로 받으면 대학 축제나 지역 고등학교 가서 나눠주는 활동이었다. 나는 바빠서 대학 축제 때만 참여해서 물품을 나눠주고 부스에 들어오는 커플들에게 짧은 OX 성 관련 교육을 최대한 재밌게 진행하는 요원을 맡았다.
문제는 대학 축제 때 우리가 부스를 열어도 되냐는 허락을 학교 행정부에서 받아야 한다는 거였는데, 축제 때 교육 부스를 연다는 게 행정위원회 대학생들에게는 좀 의외였나 보다. 이메일 답장이 안 와서 우리 팀원들이 위원회 건물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요구르트를 박스째 사서 통째로 보내기도 했다. 일 하나 추진하는 데 이런 노력은 기본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큰 교훈을 준 활동이었다.
내가 배운 걸 공유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열정적이었고 사람들도 내가 진행하는 걸 좋아해 했다. 시끄러운 축제 분위기, 모두가 술만 마시며 노는 그 속에서 우리 교육 부스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모든 팀원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고등학교 때부터 월드비전 구호단체 번역가로 활동했었다. '비전메이커'라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편지를 쓰면 그게 사진으로 찍혀서 내게 날아온다. 난 그걸 번역해서 한국 후원자들에게 보내면 되었다. 일주일 열 통씩 번역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글씨체를 알아보는 건 참.. 모험이었다. How are you 하나도 알아보지 못해서 몇 분을 헤맸었고, 자주 기가 빠졌다. 돈 되는 활동은 아니었지만 이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던 게, 회사에서 모든 직원들이 글씨체가 좋진 않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함께 나눌 때 공용으로 썼던 노트를 보면 글씨를 못 알아볼 때가 많을 수 있는데, 난 휘갈겨 쓴 글씨도 아주 잘 알아볼 수 있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능력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도 '피닉스' 숙소에서 한 달 먹고 자며 호텔 데스크에서 통역 활동을 했었다. 이건 봉사가 아니라 유급활동이었고 3주 몇 백만 원의 급여가 주어진 일이었다. 나와 같이 선발된 비슷한 또래 언니 오빠들과 통역했고, 호텔의 구조를 파악하고, 선수들을 위한 룸 투어를 돕고, 길을 안내하는 일을 했다.
여성가족부 스위스 포럼은 스위스에서 두 명의 여성 외교관이 와서 한국의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해 필요한 정책에 관해 의견을 두 시간 동안 내는 외교적 자리였는데, 1365로 지원해서 통역사로 들어간 나는 아주 간단한 일을 했다. 영어로 리모컨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알려드리고, 화장실 어딘지 알려드리고, 그런 일이었다. 포럼을 보며 가슴이 뛰고 나도 언젠가 저런 무대에 서고 싶다, 하는 포부를 가진 것 외에는 참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이런 크고 작은 통번역 봉사들이 직장 생활에서도 도움이 크게 된다. 회사가 외국계 기업이지만 모두가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건 모두의 소통을 돕는 소중한 능력이 된다. 영어를 '잘'하는 것과 '소통'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통번역' 능력과 '유창한 영어 구사' 또한 다르다. 외국인과 한국인 간의 소통을 잘 도울 수 있으려면 일치하는 영어 표현과 한국어 표현을 빠르게 찾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중요한데, 통번역 봉사가 여기에 큰 도움을 줬다.
-2편에서 계속
아프리카 지역학 전공하고 우연히 IT 회사로 들어가 PM이 돼버린 스물네 살 신입 직장인 스토리.
홍대 살고 종로에서 일해요. 취미는 비건 베이킹, 시간 날 때 피포 페인팅, 좋아하는 건 한강 보러 가기, 카페 가서 인스타그램 포스팅하기.
- 만화 연재: pm_life_24(인스타그램)
- 블로그: babylion.eun(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