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수의 노래에 담긴 나의 인생 20년
한낮의 온도가 33도를 웃돌던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볼 일이 있어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차 안의 에어컨을 세 개 틀어도 창 밖의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이기지는 못했다. 게다가 무더위에 너도 나도 차를 몰고 나왔는지 도로는 꽉 막혀있었다. 후덥지근한 열기를 이기지 못한 나는 평소 즐겨 듣는 라디오 채널 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넌 혼잔거니~물어오네요~난 그저 웃어요~’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리운 목소리였다. 그녀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자 나는 어느새 그리움을 장착한 추억 열차에 탑승하고 말았다.
스물두 살 때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때 사귀던 남자(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의 남편)가 어느 호텔에서 하는 와인 파티 티켓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와인 파티라니. 외국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멋지고 근사할 것 같았다.
애써 차려입고 파티에 도착한 우리는 짐짓 태연한 듯 와인을 마시며 사람 구경을 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서는 종종 티브이에서 보이던 얼굴도 있었다. 맛있는 와인과 들뜬 분위기에 취해 갈 무렵 화려한 조명이 켜지더니 무대 뒤에서 이은미가 등장했다.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무대에 오른 그녀는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신발을 벗는 게 아닌가. 자그마한 키에 맨발인 그녀는 열정적으로 무대를 사로잡으며 연달아 세 곡을 불렀다. 미치 작은 거인 같았다. 코앞에서 라이브로 듣는 그녀의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가수 이은미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녀의 지나간 노래들을 즐겨 듣고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며 나는 자연스럽게 팬이 되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여자 가수가 누구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리라. 그랬던 내가 한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니. 도대체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 걸까.
2005년에 발매된, 노래 ‘애인 있어요’가 담겨있는 그녀의 앨범은 20대 후반 나의 유학 생활 중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부족한 언어로 어떻게든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던 하루하루는 참으로 고단했다. 수업을 마친 후 단짝 친구가 혼자 살고 있는 좁은 방에서 함께 마시던 와인 한 잔이 커다란 낙이었다. 비슷한 재료로 만든 모양만 한국 음식인 이상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 와인과 함께 하루의 고단함과 긴장감을 내려놓던 그 시간. 늘 우리 곁에는 이은미의 노래가 함께 있었다. 때 묻은 카펫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각자 말없이 음악을 듣던 우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들었던 노래는 지금 들어도 변함이 없는데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니 믿을 수가 없다. 예고 없이 이은미의 노래를 들으며 추억 열차를 타버린 나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추억의 노래에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겹쳐져 울컥하고 있는 걸 보니 중년이라는 내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이은미를 보게 된 것은 2017년 그녀의 연말 콘서트 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꿈도 못 꾸던 시절, 우연히 이은미의 연말 콘서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이 둘 키우느라 일과 내 생활을 잠시 접어 두었던 나는 그 당시 내가 누구였는지도 잊어가는 중이었다. 콘서트에 가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목청껏 따라 부르면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같이 가달라고 졸라 우린 거금을 들여 티켓을 구입했다.
마침내 디데이. 아침부터 바빴다. 미리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던 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두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을 먹인 후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저녁까지 잘 먹고 잘 놀던 5살 막내아이가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내게 친구는 표는 날려도 되니 편하게 결정하라고 말해주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서던 그날, 그렇게 기다렸던 콘서트 장에서도 나는 별로 흥이 나질 않았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친구와 헤어져 정신없이 차를 몰아 성산대교를 건너오던 중, 8살이던 첫째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언제 와~무서워서 잠이 안 와.”
그 이후 내 삶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아이 키우며 사는 세월이 여유가 없긴 없었나 보다. 잊고 있었던 그녀에 대한 추억이 방울방울 끊임없이 솟아올랐던 그날 오후,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유튜브에 그녀를 검색해 보았다. 어느 노래 경연 예능 프로그램에서 노래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방영한 프로그램인데 평소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나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알았다면 매주 설레는 맘으로 기다려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그녀를 응원했을 텐데.. 아쉬웠다. 은빛으로 염색한 쇼트커트 스타일의 나이 든 그녀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 내 삶 속에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쌓여버린 세월만큼이나 한층 더 깊어졌을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