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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침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와 그 나뭇가지의 이야기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드는 생각

by 블루멘달

내게 12월은 일 년을 기다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특별한 달이다. 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한 해를 되돌아보고 고마운 사람들을 위한 선물과 이벤트를 기획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던 12월이 이번에는 참으로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나라가 어지러웠고 그다음에는 반려조 보름이가 나의 부주의로 인해 문틈에 끼이는 사고가 일어나 생사를 오갔다. 그리고.. 새해를 며칠 앞둔 지난 일요일에는 제주항공 비행기 추락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모든 사건들이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12월, 한 달 동안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참 허망했다.


인생은 희로애락이라던데 슬픔은 대체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걸까..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은 과연 견뎌낼 수나 있는 것일까..?


며칠 전 큰 아이의 수학 선생님과 상담이 있던 날이었다. 아이의 학습 상담 후, 어쩌다 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인 선생님과 우리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사십 대 중반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선생님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 슬픔은 대체 어떻게 견디어 내나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지 않았어요. 어머님과 여동생을 챙겨야 했고 장례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할 일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운전하다 갑자기 길가에 차를 세우고 엉엉 울었어요.”

그가 슬픔을 견뎌낸 방법은 바로 책임감이었다. 우리 나이가 이제 그런 나이구나 싶어 그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겨진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그 책임감으로 자신의 건강을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얻은 에너지는 예전보다 더 활기 있는 삶을 그에게 선물해 주었다.

”저는 작년보다 올 해가 더 저의 전성기였고 아마 내년은 올 해보다 더 전성기일 것 같아요. “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며 해맑게 웃는 그는 나이 먹는 게 싫다고 투덜대는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지만 그날 그 에너지는 분명히 나에게 전해졌다. 어쩌다 보니 아이의 상담시간이 나의 상담시간이 되고 만 것이다. 뜻밖에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보름이의 사고 후 며칠 동안 매일 병원을 오가고 밤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지만 보름이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한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며칠 동안은 그저 눈물만 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름이가 차갑게 굳어있을까 봐 겁이 나서 담요를 들춰보지 못한 채 “보름아~보름아~” 불러보았고 꿈틀 하는 모습에 오늘도 살았주었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제야 힘없이 늘어져있는 아이를 보듬고 또 울었다.

사고가 난 지 3일이 지나서야 의사는 고비는 넘긴 것 같다고 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2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름이는 다리로 제대로 서지 못하고 날지도 못한다.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걸릴지 아니 완전히 나을 수는 있는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의심은 나를 괴롭혔고 만약의 경우를 늘 대비해야 하는 불안한 시간들은 평범했던 나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보름이를 돌보며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중 설상가상으로 막내가 열감기에 걸렸고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큰 아이 그리고 아이가 나을 때쯤에는 열흘 만에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걸리고 말았다. 식구들이 차례대로 앓아누우니 나마저 아프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비타민을 메가로 챙겨 먹으며 버티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무엇보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바로친구들이었다.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터진 울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던 그들은 잘 챙겨 먹으라고 네가 아프면 안 된다며 직접 만든 음식을 가져다주거나 배달앱 쿠폰을 보내주고 자주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주었다. 그때 그들이 보내준 따뜻한 마음이 내게는 정말 큰 위로였다.


올 해의 마지막 날, 이 넓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내게 다가와준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들은 과연 전생에 나와 어떤 관계였을까?

“… 전생에 우린 누구였을까?"

“.. 그냥 어떤 아침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랑 그 나뭇가지의 관계였을 수도 있는 거지.” _영화 Past Lives

그저 전생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와 그 나뭇가지였더라도 이번 생에 다시 만나 맺은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새해에도 잘 이어나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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