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중독
최근 뉴스를 보다가 사회면의 한 기사에서 '권리 중독'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게 되었다.
사전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전혀 새로운 합성어, 아마 해당 글을 쓴 기자가 처음 만들어 낸 단어인 듯하다.
명확한 정의도 내려지지 않은 합성어에 불과하지만, 이 단어가 주는 시사점은 너무도 분명했다.
우리 사회는 '권리'에 중독되어 있다.
권리 :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
권리라는 단어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역사는 생각해 보면 그리 길지 않다.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조금씩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근대적 의미의 인권은 200여 년 전 프랑스 시민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 인간은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더 최근까지 권리를 위해 싸워왔다.
7080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섰고, 그 결과 국민이 주인이 되어 권리를 누리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이어졌다.
90년대생인 나의 기억 속에도 선명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그동안 존중받지 못했던 학생들의 인권을 혁신적으로 신장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학생인권조례로 인한 학생 인권의 신장 이후 10여 년, 교권이 이토록 추락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그 변화를 주도했던 당찬 90년대생들은 지금 교사의 입장이 되어 교권이 추락된 교육 현장에서 이 역풍을 그대로 맞아내고 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인권이란 건 누군가의 인권이 신장하면 누군가의 인권은 추락하는 시소와 같은 걸까?
정말 어떤 이들의 말처럼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의 원인이 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건 아니다.' 이다.
어떤 집단의 인권이 신장되어 다른 집단이 피해 보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중독된 사람들, 사회에 의해 권리의 불균형이 초래되는 것이다.
내 가게니까 내 마음대로 운영할 권리가 있어! (노 키즈, 노 학생, 노 노인, 노 20대, 노 펫, 노 슬리퍼, 노 츄리닝 존 등)
내 돈 냈으니깐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소비자)
내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이것도 안 해줘?! (공무원, 교사)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일을 '권리'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권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똑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경향성이 심해지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권리라는 이름으로 고개가 빳빳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 돈 내고 이용하는데 이럴 권리 있지 않아요?'
'내가 세금을 얼마를 내는데 이런것도 똑바로 못해?!'
'내가 소비자인데 내가 불편하다 잖아요!'
저마다 그럴 '권리'가 있다며 마음대로 행동한다.
자유로울 권리, 행복할 권리가 있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는 절대 있을 수 없다.
행복할 권리가 있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기분 상해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철저히 단죄한다.
그야말로 '내'가 왕인 세상이다.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왕으로 군림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사람들은 왜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중독되었을까?
개인주의
학생 때만 해도 사회 교과서에 한국 사회는 공동체적 사회라고 배웠던 것 같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사회보다도 개인주의적 사회이다.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학교, 직장, 가정, 이웃 등 우리 사회를 연대하게 했던 공동체들 중 어떤 것이 온전히 남아있는가?
학교는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학생과 학생이 경쟁하고, 교사와 학생이 반목한다.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는 비틀릴 대로 비틀려져 있다.
직장, 회사의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단합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적인 관계는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저 내가 좀 더 편해지고자 빠져있거나,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거나, 어쨌거나 공동의 목표보다는 나 자신의 편의가 더 중요하다.
함께 일하며 월급을 받을 뿐 동료는 그저 남이다.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라고 배웠건만 가정 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가족이 남보다 못할 때도 참 많다.
이웃이라는 단어는 아마 다음 세대에게는 낯선 단어가 되어버릴 것 같다.
공동체의 붕괴는 개인주의, 나아가서 이기주의를 불러온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침해하는 것에는 언제나 예민하다.
권리 중독의 중심에는 절대적인 '나'가 있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권리를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것,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나의 권리만을 앞세우는 것, 공동체의 이익이나 사회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나의 권리만을 보호받기를 원하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권리에 중독된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곡된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우리 경제에 근간을 이루는 이념이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이념 덕분이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이념이 왜곡되자 '물질만능주의'로 도태되기 시작했고, 이는 권리중독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
'아니 내가 내 돈 내고 이용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면 마음대로 할 권리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 돈을 지불한 사람이 항상 우위에 있으며, 그렇기에 내가 내 돈을 소비한 곳에서는 어떠한 불편함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본 시스템에 대해서 마저 '내가 낸 세금'을 운운하며 조금만 불편해도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말한다.
학교 교육은 세금을 지불하고 받는 자녀 교육 서비스의 일종, 경찰도 세금을 지불하고 얻는 경호 서비스, 소방관은 세금으로 드는 보험 같은 것에 불과하기에 그들을 존중할 필요도 없고, 무엇이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무언가 불편하다? 심기를 거스른다? 사정없이 민원을 넣는다.
'출동할 때 사이렌 소리 끄고 다녀요! 시끄러우니까'
'선생님, 채점을 빨간색 색연필로 하신 거예요? 애들 기죽이려고 일부러 이러세요?! 이것도 정서적 학대예요!'
'차 빼라고?! 내가 주차해 놓았는데 네가 뭔데 차를 빼라 마라야? 밀고가? 어디 가보시지! 소방관 돈 많은가 봐?'
공공의 이익을 위해 불편을 감내할 생각도, 각 직업의 전문성을 인정해 줄 생각도 없다.
왜? 돈 냈으니까!
비인간화(대상화)
원래는 경제 개념이었어야 할 이 자본주의 이념은 3차 산업혁명 이후 서비스직이 급증하게 되자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자본으로 물질이 아닌 서비스를 사는 산업구조는 서서히 관계를 변질시켰다.
자본을 지불한 사람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닌 서비스 그 자체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런 비인간화 현상은 사회의 고도화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의 증가로 더욱 심화하였다.
SNS에서 경찰관의 하소연이 담긴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경찰관이 휴대폰을 보고 서 있는 것(사실은 폴리폰이었다고 한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것, 순찰차가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것 등을 보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경찰이 그래도 되냐며 민원을 넣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경찰관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커피를 마시고, 주유하는 행위에까지 자신들이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까?
그들에게 경찰은 동등한 인간이 아닌 자신들이 세금을 내고 제공받는 서비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제공받는 자신들과 같은 것을 누려선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필수적인 생활양식임에도.
권리중독과 불편함
권리 의식의 신장은 우리가 겪고 있는 구조적이고 불합리한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로 인해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리에 중독된 사람들은 구조적인, 혹은 불합리한 불편함이 아닌 개인의 감정적 불편함마저 권리라는 이름을 붙여 해소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얼마 전 유명한 예능 PD가 유튜브에서 가볍게 꺼낸 말이 나에겐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탕수육 부먹, 찍먹 그런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 모르겠다.
누가 부으면 부먹으로 먹고 아니면 찍먹으로 먹고 그게 그렇게 어렵고 절대 안 되는 일인가?
(요약)
여러 사람이 함께 탕수육을 먹을 때 누군가 소스를 부어버리면 불편해질 수 있다.
'나도 내 돈 내고 먹는 탕수육인데 마음대로 소스를 부어버린다고?!'
물론, 상의 없이 소스를 부어버리는 게 좋은 행동은 아니다.
나 역시 찍먹파로서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 문제에 권리를 대입한다면 부먹파와 찍먹파의 대립, 찍먹파의 보이콧 선언, 관계의 붕괴라는 파괴적인 결말밖에 얻지 못한다.
사회는 다양한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탕수육 소스가 한 번 부어졌다고, 혹은 부어지지 않았다고 '내 취향이 존중받지 못했다.' 혹은 '내 권리가 침해됐다.'라고 생각하며 불편해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소한 권리들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며 식사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탕수육을 함께 먹는 그 사람과 쌓아가는 관계, 대화를 통해 얻어가는 이득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