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불편함이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불편함이란 감정을 조금 더 많이 느끼고, 많이 표현하며 살아간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쉴 새 없이 이런 불편을 쏟아놓는다면, 그 관계는 얼마가지 못해 어려워질 것이다.
여기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라떼는 말이야~"
"아니 내 돈 내고 내 맘대로 한다는데!"
"나라면 해주고 말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멘트들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류의 불편함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이런 불편함이란 감정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찾아올까?
불편한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아보자.
2019년~2021년 사이 인터넷을 휩쓸었던 유행어가 있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유행어는 자신의 경험을 강조하며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척 돌려 까는 '꼰대'들을 비꼰 유행어였다. (진심 어린 조언과는 다른 개념)
90년대생들의 본격적인 사회진출로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세대와 기성세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이 유행어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수많은 패러디와 개그의 소재가 되었다.
여기서 대립하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단어가 바로 '꼰대'와 'MZ세대'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걸어온 길,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MZ세대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 때는 말이야, 점심시간이 되면 상사한테 가서 식사 메뉴 먼저 물어봤어."
"샌드위치 휴일에 신입이 연차를 써?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었어. 세상 많이 좋아졌다."
"내가 니 연차 때는 말이야, 병가? 병가는 무슨, 쓰러져도 회사 와서 쓰러졌어."
사실 '나 때는~', '요즘 애들은~'과 같은 말들은 최근 들어 생긴 말은 아니다.
선사시대 벽화에서부터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하니 그 역사가 어마어마하다.
이쯤 되면 '라떼는~'은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성세대들은 늘 새로운 세대에게 불편함을 느낄까?
'라떼는 말이야'의 가장 흔한 레퍼토리는 '나 때는 00 했는데, 요즘은~'이다.
'나 때는 선배들 뒤치다꺼리 신입이 다 했는데, 이걸 안 하겠다고?!'
'나는 신입 때 병가는 무슨 연차 한 번 쓰기 힘들었는데, 아프다고 바로 병가를 써?!'
사실은 나도 하기 싫었으나 직장문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뒤치다꺼리,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눈치 보며 사용하지 못했던 병가와 연차.
내가 경험한 어려움들을 새로운 세대가 거부할 때, 마음속에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생긴다.
'이제 내가 받을 차례인데, 내가 한 만큼 나도 받아야 하는데….'
너무 당연히 대물림 될 줄 알았던 일들을 다음 세대는 하지 않겠다니 큰 손해를 본 느낌이다.
하지만 '뒤치다꺼리'와 '병가, 연차 눈치 보며 쓰기'가 계약서상 기재되어 있는 의무 사항도 아니고, 그저 관습이기에 대놓고 뭐라고 할 수 없으니 그저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불편한 마음을 티 낼 수 있는 방법은 '라떼는~'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어려움과 불합리함에 대한 보상을 새로운 세대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내가 경험했던 불편한 일의 보상을 현재의 타인에게서 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도 과거의 내가 경험한 어려움을 새로운 세대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건 옳지 않다.
타인에게 불합리함을 양도한다고 해서 나의 과거가 보상되진 않는다.
당장의 기분은 조금 통쾌할 수 있겠으나 관계를 망치고, 조직 내 좋지 않은 문화를 대물림 하는 것뿐이다.
불합리함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떤 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슷한 상황에서 다시 라떼를 소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대 앞에서 불편한 감정이 되풀이되고, 계속해서 라떼를 소환하게 된다면 과거 사건 속의 불편한 감정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불합리함을 합리한 방향으로 바꾸었다면 당신이 과거를 기억하는 감정은 분명 다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과거의 내가 불편했던 것을 현재 타인이 불편한 것으로 보상받을 수는 없다.
'보상'이란 것은 나를 향해야 하는 것이다.
'보상 심리'가 타인에게 향하는 것, 과거 경험이 현재의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은 그저 비뚤어진 복수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사시대부터 '요즘 애들'은 기성세대의 관습 중 일부를 거부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건 속칭 '꼰대'가 되어버린 기성세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최근 유명한 코미디 프로에서 X세대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들이 화재이다.
그들의 분장이나 말투도 재밌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X세대의 사고방식이 꽤나 개방적이란 점이다.
이미 직장에서, 사회에서 주요한 요직에 올라가 있는 그들이 젊었을 때, 그들 역시 새로운 것을 좇으며,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던 신세대였다.
그 시대의 변혁을 직접 보지 못한 내가 봐도 X세대의 직장 모습과 지금의 직장 모습은 많이 다르다.
담배 연기 자욱하던 직장의 풍경을 바꾼 건 누구였을까?
서류로만 업무하던 회사에 컴퓨터를 들여놓고 업무체계를 바꾼 건 어느 세대의 일이었을까?
남성 위주의 사회에 여성의 자리를 만들어 나간 건 어느 세대였을까?
그들의 윗세대는 그런 변화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결국 역사는 새로운 세대들로 인해 다시 쓰인다.
X세대가 몰고 왔던 바람을 이제 MZ세대가 다시 몰고 온다.
사회는 빠르게 발전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빠르게 변한다.
변화는 기성세대에게 늘 불편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변화들은 필연적이다.
내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불합리함, 불편함, 억울한 일들은 내 대에서 끊자.
나 때를 거론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어른다운 모습일 것이다.
사실 경험에서 오는 불편함은 세대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불편함이 '꼰대'만 경험하는 감정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이 불편함은 어린아이들의 관계에서 더 많이 보인다.
'엄마 나는 학원 다녀와서 컴퓨터 했는데, 형은 왜 학원 다녀오기 전에 해요?!'
'아빠 난 14살까지 휴대폰 없었는데, 왜 동생은 10살인데 휴대폰을 사줘요?!'
이렇게 불평하는 자녀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형은 학원이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나니깐 지금 미리 하는 거고, 너는 학원이 일찍 끝나니깐 끝나고 나서 할 수 있는 거고 상황이 다르잖아'
'너 10살 때는 엄마가 시간 맞춰 데리러 갔지만, 지금은 엄마가 일 다니느라 동생이 바로 학원에 가야 하잖아. 그때랑 같을 수가 없지'
경험은 모두에게 같게 적용될 수 없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각자가 경험하는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비교하며 모두를 맞추려 하는 것은 결국 당사자의 마음에만 불편함을 남기는 일이다.
경험의 차이로 인한 불편한 마음이 들 때, 나의 마음을 아이의 자리에 두고 조금 멀리서 바라보자.
우리의 부모님처럼, 혹은 우리가 자녀에게 하듯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면 상황과 조건이 다르다는 것이 보일 것이다.
내 불편한 마음을 '라떼'에 실어 내뱉기 전에, 내 마음속 아이를 다독여 주자.
'그때, 그 심부름이 너도 참 하기 싫었구나', '그때 아픈데 쉬지도 못하고 출근하느라 애썼어.'
과거의 나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나뿐이다.
경험은 무기이다.
이 무기를 타인에게 휘두르는 무기로 사용할지, 나의 삶을 바꿀 무기로 사용할지는 무기를 들고 있는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