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의 근원
출근 시간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에 할머니 한 명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많은 양의 짐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누군가는 열차에 올라서는 할머니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 하필 출근 시간에 사람도 많은 지하철에 저렇게 이고 지고 타셔야 돼? 사람 없는 시간에 좀 다니시지'
반면에 다른 이는 이렇게 느꼈다.
'이 아침에 어딜 저렇게 가시는 거지? 사람도 많은데 저거 다 들고 다니시려면 힘드시겠다.'
또 다른 이는 할머니를 보고도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었다.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을 말한다.
감정은 현상이나 일, 즉 외부요인에 의하여 촉발된다.
하지만 같은 상황을 겪어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달라진다.
감정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사건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하느냐이다.
위의 할머니 예에서 첫 번째 사람은 이 사건을 '피해'의 관점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타인(할머니)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세 번째 사람에게 할머니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다.
아마 세 번째 사람에게 할머니에 관해 물어보면 기억하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상황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주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는 사람이라면 이런 인지, 해석의 방식에 왜곡이 발생했을 수 있다.
얼마 전 SNS를 뜨겁게 달군 표현이 있다.
"내 아들 손이 친구 뺨에 맞았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를 4년여간 괴롭혀 온 학부모가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던 교실 내 사건을 묘사하며 쓴 표현이다.
분명 친구의 뺨을 때린 것은 아들임에도 '손이 뺨에 맞았다'는 표현을 쓰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꾸고 있었다.
어떻게 뺨이 손을 때릴 수 있을까?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멀쩡하던 선생님을 아동학대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나 보다.
이분이 쓴 글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며 정말 놀랐던 점은 이 표현이 그저 정당화하기 위해 고르고 고른 단어가 아니었단 점이다.
글 곳곳에는 이분이 사건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하는지, 그에 따라 어떤 감정에 휩싸여 행동했는지가 너무 잘 보였다. 그의 해석방식은 참으로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된 인지와 해석방식을 가진 사람은 이분뿐만이 아니다.
사실 요즘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사과문을 올리거나, 해명문을 올린 후 대중의 질타를 받는 경우, 대부분 상황에 대한 인지나 해석이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지나 해석이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 내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걸까?
사람들이 쉽게 불편함을 느끼도록 하는 인지 왜곡의 방식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왜곡방식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아비대증
'자아존중감'은 스스로의 가치, 능력, 통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흔히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낮은 자아존중감을 가진 사람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려움을 겪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자아존중감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지나치게 높아진 상태를 자아비대 상태라고 한다.
자아가 비대해진 상태는 낮은 자아존중감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하다.
낮은 자아존중감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공격으로 쉽게 우울해지고, 때때로 내재된 부정적인 감정이 표출되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비대해진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에 어딜 가나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자신의 기대보다 조금이라도 낮은 대우를 받았을 때 그들은 마치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분노한다.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공격을 더 많이 하는 것에 비해 비대해진 자아를 가진 사람은 분노의 방향이 타인에게로 향한다.
비대한 자아가 더 파괴적인 이유이다.
피해의식
자아가 비대해진 사람들은 불편한 감정을 더 쉽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해석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이 받고자 하는, 혹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접에 못 미치는 대우를 받고, 자신이 스스로를 대하는 만큼 타인이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사는 삶은 오히려 점점 더 피폐해진다.
강력한 피해의식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 자신을 타인의 부정적인 행동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과는 반대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획득 성격 특성
피해의식은 자아비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나, 낮은 자존감 등 다양한 요인에서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자아가 비대해져 피해의식에 휩싸인 삶은 훨씬 피곤하다.
입사하고 싶은 회사면접에서 떨어져도 "내가 훨씬 스펙이 좋은데 같이 면접 본 여자애가 눈웃음치면서 끼 부리더라니깐, 그래서 걔가 붙은 거라니까, 진짜 우리 사회는 썩었다.", 자신의 실수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어도 "아까 아르바이트생 봤어? 내가 커피 좀 쏟았다고 정색하면서 '제가 치우겠습니다. 손 씻고 오세요'하는 거? 무서워서 어디 카페 오겠어?".
자신의 실수도, 경쟁의 결과도 절대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다.
강력한 피해의식의 결과는 파괴적 응징이다.
실제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의 범죄자들은 대부분 자아가 비대한 상태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각종 혐오범죄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이다.
'흑인이 백인이 서야 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자리는 원래 우월한 백인의 자리이다.'
인종범죄를 저지르는 저들의 논리 속에는 비대한 자아와 그에 따른 피해의식이 여실히 보인다.
안하무인
안하무인 : 눈 아래에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방자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김을 이르는 말.
자아가 비대해진 사람은 사회의 질서, 타인의 감정, 타인의 삶보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기준도 '나', 우선순위도 '나'인 상태가 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사회적인 질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편한 감정을 해결하라 요구한다.
자아가 비대해진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 나 자신만 있는 안하무인의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객님, 그게 아니고요.) 뭐?! 지금 내 말이 틀렸다는 거예요?! 나 00대 나온 사람이에요! 배운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네! 어디서 못 배운 것들이!"
이런 안하무인의 상태에 빠진 사람은 갈등 상황에 종종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먹인다.
나의 학력, 직업, 배경, 재력, 가족 등을 들먹이며 타인을 굴복시키려 한다.
실상 갈등 상황과 관련 없는 언급임에도 논리가 아닌 '나' 자체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높은 자존감의 함정
요즘 들어 자아비대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참 많다고 느껴진다.
자아를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기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타인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높은 자존감과 자아비대는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높은 자존감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자아 비대의 상태는 자신의 가능성을 부풀려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지만,
자아가 비대한 상태인 사람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거부하며, 타인에게 화살을 돌린다.
뭐든 과유불급이다.
한 뉴스에서 '작은 자아'라는 단어를 보았다.
'나는 대단하지 않다'라는 작은 자아를 가졌을 때, 나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기합을 뺀 상태일 때,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아가 비대해진 이 사회에 나는 이 '작은 자아'가 꼭 필요한 것 같다.
꼿꼿해진 목에 힘을 빼고, 한껏 올라간 어깨에 긴장을 풀면 나 스스로도, 우리 사회도 좀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