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제법 선선해진 어느 가을날, 평소 집을 나서던 출근 시간대가 아닌 11시에 지하철에 탔다.
늘 북적이던 9호선이 한적한 모습이라니 참 낯설다.
노량진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열차 탑승장으로 나와보니 오래된 선로에 햇빛이 비는 풍경이 꽤나 예쁘다.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는 지하철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매일 출퇴근길에 시달려서인지, 나는 유독 지하철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 붐비는 출근길 지옥철에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임산부석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아저씨들, 발 디딜 틈도 없어 까치발 딛고 서 있는데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 와중에 백팩으로 나의 얼굴을 가격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불편한 감정의 지뢰밭이었다.
그런데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탄 11시의 지하철에서는 비슷한 풍경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짐을 많이 들고 타든, 임산부석에 아저씨가 앉아있든, 백팩을 그대로 메고 타는 사람이 있든 말든, 그저 풍경으로 느껴졌다.
불편함의 근원지가 나 자신이었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불편 : 어떤 것을 사용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거북하거나 괴로움. /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괴로움.
불편함은 감정이며, 감정은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누가 감히 뭐라 할 수 있을까?
다만, 이 불편함이라는 감정이 감정을 넘어 행동이 되고, 개인을 넘어 사회의 정서가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
사회가 발전하며 사람들은 점점 더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다양해진 교통수단, 고도로 발전되고 있는 가전제품들, 사회 안전망의 확충과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인한 빠른 쇼핑, 문화, 여가 생활 등, 일상생활에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은 신속히 제거되고 있으며,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 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편리해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작은 불편한 감정도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회사 퇴근하고 나서 일 보려 하면 공무원들 다 퇴근해서 일을 못 보는데,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무원들은 야간민원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이렌 소리 시끄러워요! 소방서는 솔직히 혐오시설 아니에요?! 출동할 때 사이렌 끄고 나가지 않으면 아파트 주민들 집단시위 할 거예요!"
이 불편한 감정에 잘못 휘둘린 사람들은 일의 경중도, 우선순위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불편함'이 공공의 이익보다 앞서고, '나의 편의'가 타인의 삶보다 우선이 된다.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교권 추락 사태를 보면 이러한 현상이 명확히 보인다.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행동하던, 어떤 피해를 주었든 간에 내 아이가 불편함을 겪어선 안 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취한 조치일지라도 나와 아이의 감정을 거스르는 순간 잘못이 된다.
그리고 내가 겪은 불편함은 어떤 수단으로든, 두 배, 세 배 보복한다.
내 행동은 정당하다. 왜? 나를 불편하게 했으니까.
이런 사례들이 극단적인 일부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함의 허들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으며 일상 곳곳에서 우리는 이 불편한 감정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마주하게 된다.
서비스직은 하루에도 몇 명씩 진상 고객을 맞이하고, 공무원은 악성 민원인과 일주일에도 몇 번씩 사투를 벌인다. 교육 현장도 보육 현장도 아이 눈치, 부모 눈치, 기분상해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눈치를 보며 지낸다.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다. 일을 안 하는 사람은 그런 상황을 안 만나는가?
최근엔 되려 알바나 사장이 손님에게 불편한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인터넷은 이미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크고 작은 불편감 호소로 가득 차 있다.
다들 불편한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잘못 건드리면 펑 하고 폭발해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사회에 가득 찬 불편한 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공격적인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불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불편한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이란 감정은 아주 큰 역할을 해왔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봉건제라는 사회제도에 불편함을 가진 이들이 없었다면, 착취적인 구조를 인정하고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은 채 지금껏 역사가 흘러왔다면, 민주주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이만큼 자유롭고 존중받는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또한 많은 발명은 불편함으로부터 출발한다. 호롱불을 켜고 사는 삶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전구가 발명되었을까? 동물을 이동 수단으로 삼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전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흐름을 보면 불편함이란 감정은 사회발전의 필수적인 요소임 틀림없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을 잘 풀어내지 못한다면 이 감정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먼저는 자신에게, 이후에는 타인에게 이다.
불편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쉽게 불평하게 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일들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그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전반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자체가 이미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 감정이 타인에게 향하면 그 결과는 훨씬 더 파괴적이 된다.
타인을 향한 불편한 감정은 특히나 약자에게 쉽게 표출이 된다.
사회적 약자 혹은 관계적 약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무기 삼아 휘두르게 되면 상대방의 삶은 금세 피폐해진다.
맞대응조차 할 수 없는 약자에게 이 감정을 쏟아놓으면 뭐가 통쾌하기라도 한지, 한번 시작된 이런 관계는 처음에 불편을 느꼈던 문제가 무엇이던, 그것이 해결되었든 안되었든 상관없이 끝장까지 간다.
요즘은 이렇게 감정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 문제이다.
감정의 주인은 '나'이다.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어떤 감정에든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불편한 감정은 나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감정을 잘 다스리고, 또 발전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감정들을 다스릴 수 있을까?
먼저, 불편함이란 감정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우리가 왜, 언제 불편함을 느끼는지, 왜 사람마다 불편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정도가 다른지, 이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것인지 알아야 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지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편한 감정에 지배된 사람들의 결국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학부모들이며, 진상들이며, 그들의 악마 같은 행동들과 그 결과를 보았다.
감정에 지배되어 행동한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어 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