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길을 내어주는 것

by 지구별여행자

오랜만에 우리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평소라면 벌써 우당탕탕 왁자지껄 시끄러워야 정상이지만 독서시간만큼은 모두가 불문율처럼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한다. 나는 미루고 미뤘던 책상 서랍 정리를 할까 하다가 독서 분위기에 방해될까 싶어 최대한 조용히 숙제검사를 하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웽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에 환기하느라 열어뒀던 운동장 쪽 창문으로 날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나만 눈치챘던 터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조용히 나가주길 바랐는데 역시 쉽게 나갈 수 없다는 듯 벌은 블라인드 쪽에 연신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아이가 꺅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벌써 복도로 뛰쳐나가 있는 아이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냥 벌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장수말벌임을 확인하고 적잖이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창문을 모두 열라고 지시하고는 책상 위로 올라가 도화지로 벌의 엉덩이를 살살 밀어주었다. 큰일 난 것처럼 소리를 꺅꺅 지르던 아이들도 벌이 쌩하고 창문 밖으로 날아가자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 최고~!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뿌듯하면서도 괜히 머쓱해진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2교시 수업 준비를 했다. 언제부턴가 벌 따위의 벌레가 교실로 들어오면 반응하지 않고 오늘처럼 조용히 내보내게 되었다. 그건 시골에서 자란 덕에 벌레에 내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명을 쉬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살면서 배워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조용히 길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쉽고 좋은 방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벌에 맞서 싸우거나 호들갑을 떨며 죽이는 것보다 그저 창문을 열어주고 나갈 수 있도록 엉덩이를 떠밀어 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5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6교시 수업을 준비하면서 칠판에 학습목표를 적고 있는데 방송으로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이 들리더니 화재경보 방송이 나왔다. 당황한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3교시에 이미 화재대피훈련을 하고 난 터라 아마도 방송오작동이겠거니 생각하고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종을 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는"선생님~ 오작동이던 아니던 일단 대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맞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아이들에게 복도로 질서 있게 나가라고 이야기했다. 적잖이 당황했을 법도 한데 아이들은 3교시의 훈련 덕분인지 나름 질서를 유지하며 뒷 문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서로 나가려고 버둥대다가 작은 충돌도 있었지만 이내 양보하면서 물 흐르듯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운동장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는데 교감 선생님이 나와 계신다. 역시 방송 오작동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아이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수업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에 와서는 수업대신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오작동이든 아니든 화재경보가 울리면 일단 대피하는 것이 맞다고. 그런 상황에서 용기 있게 얘기해 준 OO 이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아까 질서 있게 복도로 나가는 모습을 칭찬하면서 가장 안전하고 빠르게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서로 나가려고만 했으면 문 앞에서 싸우느라 모든 시간을 허비했을 거라고. 의외의 칭찬에 머쓱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기분 좋은 어색함이 전해졌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텅 빈 교실에서 하루를 되돌아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도 이와 같지 않나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획하지 않은 일들을 더 많이 마주친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열에 하나만 돼도 성공한 삶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네 인생은 예상 밖의 일들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만남은 기가 막힌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나고 삶의 방향도 처음 세웠던 계획과는 다른 전개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측 불허의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갑자기 던져지는 이벤트 덕분에 인생은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그런 경험이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마련이지만 그 순간은 때때로 견디기 벅차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살아보니 그런 순간이 왔을 때, 그러니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인생의 고뇌와 각종 사고들,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 원치 않는 감정들이 나에게 밀려올 때,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도망가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그 일이, 감정, 사람이 나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 싶다. 어쩌면 나와 상관없을 하찮은 벌에 온 정신을 빼앗겨 스스로 혼란에 빠지기보다는 벌이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조용히 자기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창문을 열고 엉덩이를 토닥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에는 내가 초대한 손님보다 불청객이 훨씬 자주 찾아온다. 그때마다 불청객과 싸우거나 쫓아내려고 발버둥을 치기보다는 그저 내 삶에 잠시 머물렀다가 알아서 나갈 수 있도록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던 슬픔이나 분노도 시간이 지나면 희석되고 바래진다. 담아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저절로 해결되는 일이 더 많다. 자그마한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지만 드넓은 대지를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은 썩지 않고 생명을 잉태시킨다. 조용히 서로에게 길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해결된다. 사람이든 감정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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