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늑대와 흰 사슴(2)

- 영화 같은 여행 이야기 09 : 몽골 2편

by 보이는 말들

언제부턴가 국내에서 ‘토포필리아(장소에 대한 사랑)’‘인문지리’니 하는 화두가 유행했고, 그 화두의 근간은 ‘이푸 투안’이라는 중국계 미국 지리학자의 연구이다. 그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장소와 공간’이라는 화두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객관적인 ‘공간’에 인간의 경험과 감정이 결합되며 특별한 의미와 애착을 가지게 된 주관적인 공간은 ‘장소’가 되기 마련이다. 공간(空間)은 ‘비어 있는 곳’으로 물리적인 ‘space’이며 장소(場所)는 ‘무엇이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곳’으로 인문학적인 ‘place’이다. 여행이라는 행위도 이 공간이 장소가 되는 작업인 셈이다. 우리 가족, 특히 아이들에게 몽골 여행에서 의미 있던 장소를 위주로 말해 보겠다.


5. 장소


이푸 투안 이야기를 한 김에 그의 책에서 이 대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여행이라는 행위는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에 의미가 크다,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장소에 점을 찍고 '화살표'를 표시하고 방향을 제시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가, 즉 다른 점을 하나 찍고는 다시 원래 점으로 돌아온다는, ‘정주(定住)’와는 다른 ‘이동(移動)’, 혹은 이주, 아니면 여행의 의미란, 어차피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갈 때의 그 ‘방향’에 의미가 크다는, 식으로 기억난다. 이 의미가 대체로 ‘이주’의 이유일 것이다. 또한 화살표도 두 개가 생길 테니, 그 둘의 ‘차이’에서 대체로 ‘여행’의 의미가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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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이번 몽골 여행 안에서 또 다른 여행을 시도했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갔다 왔다를 넘어서서, 그 나라에 가서 ‘기차’를 탔다. 그것도 야간 침대 열차였고, 놀랍게도 그 기차는 ‘석탄’(갈탄) 열차라고 불린다. 정말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여 가는 증기 기관차인 줄 알았는데, 설마가 설마라고, 여느 기차처럼 디젤이 주 연료인데, 겨울철에는 난방을 위해 전기와 석탄을 함께 사용해서, 그렇게 불린단다. 그리고 실제 이 종단 열차가 여객용 말고도 화물용도로는 석탄 운반이 주요 목적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열차는 처음 저녁에 탈 때만 와우 신날 뿐, 어른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결코 넓을 리가 없는 공간에 4인실이니 가족이라 그나마 참을 수 있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쓰는 건, 허허허, 마치 우리네 70년대 민중소설 <삼포 가는 길> 같은 느낌이다.

정확하게 평가하자면, 아이들은 이층 침대로 올라가서 자기들 하고 싶은 게임 마음껏 시켜주니 좋고, 때 되면 컵라면 뜨거운 물 받아먹어 신나고, 이게 밤 10시가 되면 그래도 사람들 이제 통로에 나오지 않고 방에 들어가 취침을 하는데, 신기한 것은 가는 내내 역은 역마다 다 서니, 별의별 방송은 다 들린다. 우리도 그때부터 침대에 머리를 두고 누워봤는데, 기차의 덜컹거리는 느낌 때문에 쉬이 잠들지는 못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피곤해서 그런지 기가 막히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어른들도 그냥 피곤해서 잘도 잤다. 저녁 8시에 타서 새벽 6시에 떨어지는 장장 10시간의 대장정이다. 중간중간 화장실에 오가며 통로에서 야경도 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날씨가 너무 추워 거의 방 안에 커튼 치고 있었다.

그나마 울란바타르에서 수흐바타르 갈 때는 옆 칸 몽골 아이 다섯 살 ‘잠보’라는 친구가 우리 칸에 놀러 와서 자신의 장난감 총을 자랑했다. 어머니와 대화해보니 아버지가 경찰이라 총이 많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이 친구와 대화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그냥 아빠만 몇 번 총 맞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칠 뿐이었다. 그래, 이제 한국의 아이들은 이 정서를 모른다. 놀랍게도 이 아이도 사진 찍자는 제안은 거절한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사탕이랑 젤리 정도를 나눠 먹는 선에서 ‘이방인과의 만남’을 종료했다. 나의 친구는 우리 가족과 떨어져 옆 칸에서 몽골 사람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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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이 우리 여행의 핵심이었다. 시속 60~70km의 완만한 직선운동이 우리의 이동의 컨셉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 타본 것은 1, 4호선 지하철이나 부산 갈 때 수원이나 광명에서 타던 KTX가 전부였던 우리 아이들에게, 마치 나 어린 시절 비둘기나 통일호의 추억을 선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우리가 ‘수흐바타르’라는 북쪽 도시를 갔던 까닭은 ‘알탄볼락’이라는 러시아 국경과, ‘세흐니후틀’이라는 독립전쟁의 성지와, 킴벌리숲이라고도 불리는 ‘토진나르스’와, 그곳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격전지이자 조강지처 보르테를 구출한 성지라고 알려진 ‘보르헤링탈’ 평원, 그리고 마지막 아내 ‘홀란’ 동상이 있는 전망대까지, 몽골 북부지역, 즉 ‘셀렝게’ 아이막이라는 지역의 매력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 즉 장소애, 토포필리아는 나의 친구의 것이다. 우리 아들들은 ‘삼촌’이라고 부르며 내 친구를 잘 따랐고, 삼촌이 자신들보다 이번 여행에서 더 신나 보인다고도 말했다. 짧은 하루였지만 24시간 내내 몽골 북부의 셀렝게 혹은 수흐바타르를 돌아보며, 왜 내 친구가 이 장소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

가는 곳마다 ‘지평선’이 펼쳐졌다. 물론 몽골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부터 울란바타르 쪽을 지날 때도 그 풍경을 보았고, 근방에 있는 국립공원 테를지에 갔을 때도 가을 단풍이 든 바위 산과 함께 그 풍경이 극에 달했지만, 이곳은 또 달랐다. 탁 트이고 넓은 곳인데, 그 평원을 내려다보려고 높은 곳이라고 해서 올라가서 보니, 생각보다 나지막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고즈넉한 언덕이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평원을 감싸 안으며 강이 굽이굽이 돌아간다. 그 강을 따라 종단열차가 석탄도 싣고 사람도 싣고 돌아다닌다. 이곳 수흐바타르를 넘으면 러시아이다. 물이 귀한 몽골의 젖줄이라는 ‘셀렝게 강’의 여러 지류가 모두 합류하여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는 길목인데, 이 강물은 바이칼 호수까지 간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관문 이르쿠츠크가 다음 역이라니, 그곳에서 대륙횡단열차와도 만난다고 한다. 자연의 강물도 인간의 철도도 만나는 '길목'에 서 있는 셈이다. 그 풍광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 보았는데 막상 직접 보는 것만큼의 느낌으로는 남기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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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넓은 평원을 계속 달리고 달려, 그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랐고, 그 산과 전망대를 오르고 내릴 동안에는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충분히 누렸다. 아이들도 무서워할 법도 한데 신이 나서 계단을 오르고 바위를 건넜다. 마치 몽골의 아이들, 바람의 아이들이 된 듯했다. 밥 딜런의 노래 <불어오는 바람 속에>가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그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황유원 번역) 아이들은 놀랍게도 몽골에서 민들레꽃을 많이 발견했다. 파란색 천 조각이 휘감겨 있는 서낭당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민들레 홀씨를 후후 불며 날리고 놀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아내와 오래만에 어깨동무도 하고 서로 쳐다보기도 했다. 자연의 풍경이란 것도, 사람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져가는 법이다.


6. 사람


날적이로 따지면, 우리 여행의 삼분지계 중 둘째와 셋째는 얼추 이야기했으나, 첫째 부분이 빠졌다. 여행의 노른자와 같은 기차여행은 친구와 함께 북부 셀렝게의 자연 ‘풍경’을 만끽했고, 여행의 피날레는 현대 도시 울란바타르의 세련된 ‘공간’을 자유롭게 누리면서 마무리했다. 그 풍경과 공간이 우리 가족에게는 ‘장소’로 기억된 셈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몽골의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공부하는 준비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의 스타트를 열어줬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결국, 여행은 역사도 자연도 도시도 좋지만, 물론 음식이 좋아야 할텐데 몽골은 어쩔 수 없이 패스하고, 여행은 모름지기 ‘사람’이 남아야 기억이 난다.

여행을 돌아와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기억에 남는 몽골 사람들이 있었다. 아내에게는 몽골의 첫인상을 선사한 가이드 ‘에르카’였다. 아내 말로는 배구선수 김연경을 닮은 큰 키와 시원시원한 외모에, 아이들은 정말 한국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우리가 공항에 도착했으나 짐을 찾는 데 2시간이나 걸리는 바람에 미팅이 예상된 저녁 5시보다 훨씬 늦은 7시에나 만나게 되었다. 이미 해는 졌고 저녁도 식당에 들어갈 순 없으니 포장음식으로 바꾸어야 했고, 좀 일찍 가면 트레킹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기온도 이미 영하 10도대로 떨어졌다. 모든 조건이 좋지 않을 첫 만남에서 우리 가족을 편안하게 맞았다. 무엇보다 겸손한 태도가 비즈니스 모드가 아닌 그 사람 본래라는 인상을 줬다. 아내는 이렇게 평가했다, 몽골이라는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이토록 겸손하게 소개하다니! 뭐든 한국에 비하면 열악한 점에 대해 ‘발전 중이라 부족하다’고 설명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충분히 어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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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몽골다운 여행을 위해 게르 숙박을 선택했고, 첫 식사를 게르 안으로 포장해서 들고 온 ‘허르헉’(양갈비찜)으로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축복'이 뭔지를 눈으로 경험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무수히 많은 별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완벽한 실패였다. 일단 한국의 추석이라는 말은 보름달이 휘영청 밝다는 뜻이다. 몽골도 달이 밝으면 별이 안 보인다. 아무리 게르가 있는 몽골의 시골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기온이 영하 13도까지 찍었다. 도저히 5분 이상 밖에 아이들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별을 제대로 보려고 망원경까지 빌렸고 심지어 삼각대를 들고 올까 하다가 짐이 많아 포기했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몽골에서 별을 보는 것은 춥지 않고 보름달이 뜨지 않을 때만 해야 할 일이다. 몽골에서 별을 포기하니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아주 편했다. 대신 빛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날 예정대로 국립공원에서 계획한 액티비티를 했다. 국내 제주도에서 하던 ATV와 승마랑 다를 것은 크게 없는데, 결국 다른 것은 풍경이고 안전장치였다. 아이들도 제주랑 경기도에서 몇 번 타봐서 겁은 없다. 그런데 몽골 승마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하다보니 은근히 낙마사고가 있다고 했다. 그날도 영하 10도지만 꽁꽁 싸매고 1시간 동안 숲과 강과 마을로 몽골의 자연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말 위에서 바라본 풍경을 직접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 시간의 침묵과 햇살과 바람소리와 마부의 휘파람, 물소리가 기억에 남았다. 이것들은 배경이고, 여섯 마리의 말이 내는 또각또각 발굽소리와 그 말들이 중간중간 생리현상을 일으킬 때 보여준 퍼포먼스가 우리 아이들의 기억에는 생생하다. 말은 1시간쯤 돌아다니니 방귀, 오줌, 똥, 웬만한 것은 다 쌌다. 반려동물 산책시키는 것 같았다. 그때 아이들과 마부 아저씨를 쳐다볼 때, 말을 놀라게 하면 안 되니 소리는 내지 않고, 서로 히죽히죽거리던 표정도 기억난다.

나는 에르카와 함께 팀을 이룬 ‘세코’ 아하(몽골말로 아저씨)가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 젊을 때 한국 의정부에서 이삿짐센터 일 바짝 하며 그때 고깃집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울란바타르 시내 아파트에서 살며 이렇게 여행사 기사로 일하고, 일이 없는 날은 아주머니 고향 옷가게로 옷을 날라 주신단다. 그 고향이 1,000km 거리라니 가는 데만 12시간 걸린단다. 그런데 세코 아저씨는 자신이 한국에서 일하던 그 시절이, 그때는 이삿짐 일 끝나고도 밤과 새벽에 일을 더해도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아주머니와 함께라서 그랬을 듯하다.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하며 한국 사회의 법제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2000년대 중반일 테다. 그 시절 '고용허가제법'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 대화를 나눴다는 말은 세코 아저씨도 한국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 가이드 에르카와 기사 세코는 우리에게 참 좋은 몽골 사람의 인상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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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누가 제일 기억에 남았을까. 사실 또 한 명의 기사가 더 있다. 친구가 수흐바타르에서 예약한 분인데, ‘게를레’라고 아저씨보다 할아버지다. 60대 초반이고 손주 사진을 보여줬으니. 그런데 이분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빵 터졌다. 새벽에 기차역에서 픽업하고 러시아 국경까지 달려, 일출 때까지 차 안에서 남은 잠을 더 잔 후, 알탄볼락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슨 성격인지 몰랐는데 국경수비대가 출근해서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면세지역’이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니라, ‘메이드 인 러시아’가 즐비한 곳이었다. 러시아산 제품은 무엇이 좋을까.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술과 담배이다, 특히 보드카다. 나는 소싯적 조니워커 같은 위스키를 교수님 통해 얻어 마시고, 노학연대의 현장에서 민주노총 아저씨들이 건네줬던 보드카가 앱솔루트라는 것 정도를 기억한다. 나의 친구는 선교사라서 술은 잘 모른다. 그래서 이 게를레 아저씨가 얼마나 술을 사랑하는지 몰랐을 수 있다.

잘 보니 게를레 아저씨는 셀렝게 지역에서 관광 기사로 일을 하는 까닭이 가이드보다는 이 면세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러시아 술을 사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주 짧은 시간에 간파했다. 사실 손님인 우리는 러시아 산 초콜릿과 과자 몇 개만 사고는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분은 찾던 술이 있었던 게다. 그래서 자꾸 다른 가게도 둘러보자고 부탁을 했고, 나중에는 사정을 했다. 솔직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컴플레인을 걸면 제대로 할 수 있었지만, 중간에서 친구도 애매하고, 그냥 아내도 아이들도 별 욕심 없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냥 아저씨 부탁을 들어줬는데, 이 60대 어르신이 미안하다며 전력을 다해 뛰어다니셨다. 그 모습이 너무 우리 눈에는 귀엽게 보였다. 그래서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러 가게를 함께 돌면서 아저씨가 원하던 술을 결국 찾았고, 목표를 달성한 후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아저씨가 기뻐하니 우리도 기뻤고, 그 후로 우리의 여행은 참 수월했다. 아저씨가 너무 친절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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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쯤 에피소드도 소개하련다. 첫째는 그 수흐바타르에서 점심은 기사 아저씨 다른 곳에 보내고 피자를 먹고자 ‘모던 노마드’라는 곳을 찾았다. 몽골은 치즈가 맛있어서 피자도 꼭 한 번씩 먹어보라고 추천받았다. 그리고 몽골 밀가루는 글루텐 함량이 적어 소화에도 좋단다. 그런데 웬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식당에서 그때 피자만 안 된다는 게다. 그래서 우리는 호기롭게 시내 길을 걸으면서 다른 피자 가게를 찾았다. 그때가 여행 셋째날인데 이틀 동안 너무 추웠다가 날이 조금씩 풀리니 가을 오후 걷기에 딱 좋았다. 동네마다 개와 고양이들이 우리 가족을 환대했다. 여행지를 가서 현지인들의 주거지역을 걷는 경험은 생경하여 늘 기분 좋다. 그런데 그날따라 구글맵에서 찾은 피자를 판다는 두 가게마다 피자만 팔지 않았다. 그때 내 친구, 우리 아이들에게는 삼촌이, 엄청 큰 ‘말똥’을 밟았다. 그런데 그 똥을 밟고 얼마 안 있어서 치킨집을 발견했는데, 그 치킨집이 피자도 판다는 것이다. 똥 밟아서 얻게 된 행운!

둘째는 기차여행을 끝내고 울란바타르 시내에 도착한 넷째날 새벽, 즉 게르와 기차에 머문다고 샤워를 3일간 안 한 우리 가족, 실제 영하 5~13도를 오가는 밤을 3일을 지내니,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꼬질꼬질했을까. 그래서 에어비앤비 숙소 체크인 전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딸린 찜질방 ‘서울사우나’를 가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왔다. 숙소야 모든 시간 운영하고 한식당이야 밥때 되면 열겠지만, 이 사우나가 한국처럼 밤새 하는 게 아니었다. 오전 10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거지 가족’ 같았다. 친구가 미안해 했으나, 친구도 집에 가서 자녀들 등교시켜야 하니 돌려 보냈다. 적당히 이 호텔 건물 안에서 빌빌거리며 편의점과 카페 이용하다가, 씻고 점심 먹으면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 호텔 테스크와 청소 등 여러 직원들이, 담당은 아직 출근 안 했지만, 우리 가족이 찜질방 로비로 짐을 갖고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언어는 안 돼도 모두 소통이 되었다. 솔직히 어플 통역기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나중에 다 씻은 후 라운지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타르 시내의 풍경은, 정말, 정말, 상쾌했다.


7. 선교


어떻게 찜질방에서 이 ‘선교’라는 주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 가족이 로비에서 앉아 간식을 먹고 있으니, 어떤 분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중국 단둥 선교사로 있다면서, 북한선교에 대한 발표를 곧 있으면 한다면서. 좀 뜬금 맞았다. 우리 가족을 본인의 컨퍼런스에 초청된 다른 손님으로 착각하신 듯하다. 이 호텔이 지금 추석을 맞아 한인 기독교 모임을 주최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 국적의 중국 선교사는 모두 추방당한 걸로 알고 있으니, 이분은 내 추측건대, 미국에 있는 한인이다. 아직도 중국 국경지대를 통해 북한으로 접근하는 분들이 계시구나 깨닫게 되었다. 우선, 저희는 호텔과는 상관없고 사우나에 온 손님이라며 둘러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선교사님을 점심 때도 식당에서 마주쳤다. 친구 말이 이 호텔 건물은 ‘소망 프라자’라고 한인교회 사람들의 사업처가 많다고 들었다. 어딜 가나 교포와 유학생들, 즉 한인 사회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몽골도 마찬가지다. 물론, 몽골은 유학생이 거의 없을 테니, 이 많은 사업처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나의 친구와 제수씨는 현재 선교사와 이렇게 한인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고, 자녀들 역시 그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한국에서 재직하던 학교에서는 떠나올 때 ‘고용휴직’을 쓰고 싶었으나 허락이 안 되어, ‘육아휴직’ 상태로 와 있다고 한다. 그 계기는 친구가 젊을 때 ‘코이카’로 2년간 봉사한 나라가 몽골이었고, 그 이후로 계속 몽골 사람들을 한국에서 만나왔고, 올해 단기선교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의 직장도 미션스쿨이고, 교회와 여러분들의 후원으로 이곳에 파송된 셈이다. 처음에는 제수씨와 자녀들이 썩 내켜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1년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만났을 때, 분명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친구의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하겠다. 또 훗날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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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번에 친구는 나에게 귀한 선교사님을 한 분 소개해 주었다. ‘몽골한인선교교회’라고 본인 가정이 출석하는 교회의 손명목 목사님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분이 내 ‘고향교회 선배’라는 사실을 친구가 알게 된 것이다. 내 고향은 경북 의성이다. 올해 봄 큰 산불이 났을 때가 마침 선교사님이 귀국하여 고향에 들렀던 시기라고 한다. 그 황망함에 대해 설교할 때 친구가 연락이 왔다. 누구누구 아냐고, 생각해 보니 나는 직접 인연이 없지만 그분의 동생이 나 어릴 때 교회 선생님이었고, 아마 그렇다면 이 목사님은 내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잘 아실 것이라고 답했다. 백석의 시 <고향>이 떠올랐다. 타향에서 몸이 아파 한의원을 찾았는데, 마침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가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으로 시작하여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로 끝나는 작품이다.

울란바타르 숙소에 짐을 풀고 아내와 아이들은 잠시 휴식하도록 해놓고, 친구를 다시 만나 교회를 찾았다. 때는 추석이니 한국식으로 뭐라도 손에 선물로 차(茶)를 들고 갔고, 선교사님도 명절이라며 ‘떡’과 ‘대추’를 내주셨다. 대학 때 친구를 사이에 두고 처음 뵙는 고향 분을 한 시간 남짓 만났는데, 참 따뜻했다. 그리고 친구도 우리 목사님 이렇게 신나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신기하다고 했다. 이상하게 ‘고향’은 멀리 나와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목사님도 내 친구를 ‘선교사님’이라며 존대하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인격을 엿볼 수 있었고, 내가 그의 친구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짧으면 짧았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선교사님으로부터 이 몽골이라는 사회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제공받은 셈이다. 외국의 한 장소에서 '18년간' 꿋꿋하게 살아오며 일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8. 복귀


이제 여행에서 돌아온 지 2주가 지났고 3주째다.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으니 이러한 글도 쓰리라. 연휴 끝나고 바로 출근하며 강의하고, 아이들도 다시 학교 다니고, 우리 가족은 정신 없이 일상을 살고 있다. 후유증을 앓을 겨를이 없었던 까닭은 추석 지나고 아버지가 쓰러진 사건 때문이다. 내가 장남인데 고향 가까이 있던 차남, 즉 동생 내외가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고,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CT와 MRI를 거쳐 심전도검사까지 했지만, 뚜렷한 이유는 찾지 못한 채, 건강을 회복했다. 뇌와 심장 쪽 문제라 정밀검사가 필요하니, 이제 장남네 집 가까운 서울 쪽 병원으로 전원하려고 한다. 참 다행이고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했던 일이다. 그 급박한 시기, 어머니와 동생은 여행 중인 우리 가족에게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 내려 집으로 돌아온 후 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로 여태까지 일상을 그 정신으로 쭉 살고 있는 듯하다. 정말 인생은 여행처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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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 쓰며 이번 몽골 여행을 정리하는 셈이다. 우리 가족에게, 우리 부부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가족은 몽골에서 지내던 일주일 동안 참 자유로웠다. 뭐랄까 ‘노마드’가 된 느낌이었다. 비록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서 일상을 정해진 대로 살아내고 있지만, 그 에너지는 넉넉하게 얻어서 온 것 같다. 그만큼 싸돌아 다녔다는 뜻이다. 말 타고 오토바이 타고 기차 타고 걸어 다니며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몽골의 바람을 맞고 왔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으로 말을 거셨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는 분명하고, 우리는 그 바람을 살결로 느끼고 소리로도 들을 수 있다. 여행을 가서 바람을 쐬면 그러한 ‘생기’가 회복된다. 언제부턴가 문명사회가 노마드 노마드 운운하는데, 나와 우리 가족이 진정한 노마드, 몽골 유목민의 자유로운 마인드로 이 삶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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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하루하루 구차하게 산다고 느낄 때면, 우리 가족을 푸른 늑대 세 마리와 흰 암사슴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말을 타고 바람을 맞으며 평원을 달릴 때면, 물소리와 휘파람이 들려온다. 기차를 타고 강물을 굽이굽이 돌아 흘러가면 어느덧 나지막한 언덕에 다다르고, 저 멀리 호수와 사막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몽골을 떠나기 전, 친구와 함께 수흐바타르에서 짧게 다녀온 ‘어머니나무’(에제모드)가 종종 떠오른다. 선교사 친구는 이곳을 영적 땅 밟기라는 마음으로 소개했을 것이며, 함께 간 기사 게를레 아저씨는 몽골 사람으로서 어머니 대하듯 정성껏 우유를 뿌렸고, 영적으로 민감한 우리 아내는 멀리서 지켜만 보았고, 나와 우리 두 아들은 그 파란색을 비롯한 온갖 천조각이 칭칭 감긴 큰 나무 사이로, 향내 가득한 그 땅을 건너왔다. 우리는 그때 푸른 늑대가 된 것 같다.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아들은 칭기즈칸처럼 되고자 성장할 테고, 함께 여행을 다닐 시간이 또 주어질 텐데, 그런 날이면 또 이 땅을 찾지 않을까. 뭐든 어디든, 멈추지 말고 가 보자, 아우!


* 이제 '보이는 말들' 시리즈로 돌아가야 하니 예고하면, 11월말은 현재 강의에서 다루는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에 대해 '사전'이라는 주제로 10번째 비평, 그리고 연말연초 겨울방학이 되면, 학술논문으로 다룬 영화 <디태치먼트><돼지의 왕>'학교'라는 주제로 묶어 11번째 비평을, <경주>'장소'라는 주제로 12번째 비평을 쓸 계획이다. 이번 주말만큼은 세계의 중심이 경주다. 트럼프는 치즈버거와 콜라만 먹고 떠났고, 시진핑은 그 텁텁한 황남빵을 맛있게 먹었다고 전하며, 젠슨 황은 치맥 러브샷으로 밈을 만들려고 깐부에 갔는 듯. 우리 이재명 대통령은 국내에선 사이다겠지만, 이번 국제무대에선 과연, 부디 '만파식적'을 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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