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 10 <프로페서 앤 매드맨> : 방법론으로서의 민중주의
1. 개인사와 영화 소개
개인사를 언급하면, 직장에서는 고3 담임이라 수능 끝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단계이다. 강의하는 대학은 종강까지 한 달이 남았다. 수강생 일부가 여길 다녀가셨을 테니 말을 아끼면, 교육대학원인데 ‘문학+매체’의 수업을 진행 중이다. 중등학교 국어교육에 적용할 만한 영화 10편을 다루고 있는데, 지난주는 이창동의 영화 <시>를 보았다. 다른 분의 논문을 읽을 뿐, 내가 감히 그 높은 작품성을 평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먹먹한 감동만 계속 가지고 갈 뿐, 지금은 무엇 하나 쓸 재료가 없다. 그리고 이번주는 이준익의 <동주>를 수강생이 발표했고, 다음주는 미국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을 내가 다루기로 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도 안 되고 비평도 전무하다. 멜 깁슨의 근래 영화가 그렇듯 ‘고품격’이라는 평가, 공동주연 숀 펜과의 투 샷은 참 좋은데, 작품에 대한 피드백이 아쉽다. 물론 감독은 이란계 미국인 파르하드 사피니아라는 사람이며 P.B.셰므란이라는 가명을 쓴다. 멜 깁슨이 제작으로 참여한 걸 보면, 그는 이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곧 있으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속편이 나온다는데, 제목은 ‘부활’이니 <레저렉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된다
이번에 멜 깁슨에 대해 조사하며 안 것인데, 그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복수 국적자이며 호주에서 자라서 영주권도 있다. <매드 맥스> 원작의 주인공이며 <위 워 솔저스>의 지휘관은 훗날 <리썰 웨폰>의 형사가 되고, 그를 최고로 만들어 준 작품은 아무래도 ‘프리덤’을 외쳤던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로 분한 <브레이브 하트>다. 흥미로운 게 그는 영국과 악연인 영화를 제법 찍었다. 나는 보지 못한 미국 독립전쟁을 다룬 <패트리어트>까지 은근히 ‘대영제국’을 비꼬는 작품에 참여한 이력이 많다.
제국주의에 대한 지식은 더 필요하겠지만, 지금 영국연방에 소속된 국가(호주), 과거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미국, 아일랜드 공화국), 아직도 ‘그레이트 브리튼’에 포함된 국가(스코틀랜드)까지, 멜 깁슨이 옥스퍼드 대사전 초판(1884~1928)의 편집자 ‘제임스 머리 경’을 연기하기에 배우의 경력이 딱 맞아떨어진다. 제임스 머리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포목상의 아들로 학력 없이 독학으로 교사, 교장, 은행 일을 하다가, 영국문헌학회장을 하던 중,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의 프레디 교수(스티브 쿠건 분, ‘프레드릭 제임스 퍼니발’이라는 인물로 추정, 제임스 머리 직전 두 번째 책임자)가 20년 간 답보 상태에 있는 이 사전 작업의 책임자로 그를 추천한다.
영화에서 추천의 이유로 든 것은 그가 최소 20개 이상의 언어와 영어의 방언을 구사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대 학자들 앞에서 그가 ‘clever’라는 말의 정의와 어원과 용례를 ‘사전처럼’ 줄줄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합격점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추천자 프레디는 그가 ‘나막신 춤’의 대가라는 농담으로 클로징 멘트를 날린다. 검색해보니 ‘클로그 댄스’라고 현대의 탭댄스 같이 영국 북부 광부들과 방직 노동자들에게서 유래한 춤이라는데, 이 지역은 발레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라 한다. 그만큼 제임스 머리는 영국의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상징이 담긴 대사인 셈이다.
2. 민중주의라는 방법
민중, 참 위험한 단어를 구사했다. 대학 다닐 때 황석영 소설을 발표하던 날 나를 포함해서 모든 학우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순수문학의 대가인 교수님께 이런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다. ‘자네는 민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읽었고 그 기반 위에서 ‘저 스스로를 민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 교수님께서 ‘민중’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문학계에서 민중을 운운했던 사람들과 오랜 세월 토론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며, 지금 와서 보니 문학은 이러이러하다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백성, 인민, 민중, 대중, 언어의 민중, 즉 언중(言衆)이란 개념이 실재하는지 말이다. 그러나 언어를 연구하고 규정하길 좋아하는 지식인 엘리트 그룹이 있다면, 그 규범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며 언어의 변화를 주도 혹은 반응하는 무리(衆)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을 ‘사람들’ 혹은 ‘people’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 보편적이다. 제임스 머리가 낙담해서 프레디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귀족인 프레디가 자기 집의 여자 하인들(그는 그중 한 여인과 결혼했다고 알려진다)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어보라며 충고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나도 가끔 학문의 길에 있어서 저러한 후견인, 스승 혹은 선배, 그게 아니면 동료라도 만나고 싶다. "선생은 심장을 만든 겁니다, 방법을 보여줬으니까요." 같은 멋진 위로를 듣고 싶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영화같이 멋진 후견인을 만나고 저렇게 훌륭한 충고를 듣긴 쉽지 않다. 사실 나에게 꾸준히 잔소리를 해주는 분들이 그 후견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가 저렇게 괜찮은 학문적 동료나 선배 혹은 스승이 되지 못하므로 아쉬워할 뿐이다. 아무튼, 부럽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임스 머리가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1879년부터 1915년 죽을 때까지 36년간 이 사전 ‘초판’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초반’에 짤리지 않게끔 출판국을 설득하는 데는 아내의 공이 크다. 영화에서는 극적으로 그려졌는데 현실도 왠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영국을 가본 적이 없다. 런던에서 캠브리지보다야 조금 더 가깝지만 지금도 1시간 넘게 차로 나가야 하는 수원쯤 되는 곳이 옥스퍼드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삼성에 다니니 동탄쯤 이사 갈 수 있다지만, 서울 살다가 경기도로 내려가는 건, 아내이자 엄마 입장에서 어렵다.
남편은 너희 같은 먹물들이 볼 때야 참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가장 자신다운 선택을 하며 성실하고 묵묵하게 이 작업을 헌신적으로 해왔고 그 가운데 우리 가정이 희생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희는 실리만 따지고 여론의 뭇매만 걱정하며 그 꼴로 여태 20년째 시간을 허비해 놓고는, 남편이 와서 5년 만에 겨우 성과를 보고 있는데, 살인자 정신병자와 함께 작업을 했다는 걸 트집 잡아, 또 남편을 끌어내리려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일갈한 셈이다. 어쩌면 내 와이프도 저 정도 강단은 있는 여자다. 내가 그리 성실하지 못해 그럴 뿐.
3. 가장 자신다운 선택
제임스 머리의 아내가 말했던 “가장 자신다운 선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자막 대사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나도 요즘 학문을 함에 있어서 가장 고민하는 게 바로 ‘나다운 공부’가 무엇인가다. 왜냐하면 사람이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자기 자질과 적성이 맞는 일을 해야 그나마 성과를 낼 수 있는데, 그 일이 공부하는 것이라면 더욱 분야를 잘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부에 대한 태도는 자기 인생에 대한 태도와 직결된다. 제임스 머리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바꾸어놓은 옥스퍼드 대사전만의 편집 방식이란, 바로 ‘역사주의’이자 ‘문헌주의’이며 ‘민중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단어의 의미가 현재 쓰이는 용례만으로, 누군가 개인의 학술적 정의로만 이루어질 리 없다. 언젠가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용례가 분명히 있으며, 그것은 영국 문학의 모든 작품을 뒤져서 그 기원과 변천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현재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그 작업을 위해 제임스 머리가 만나 함께 일한 사람들만 1천5백여 명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다. 그 작업의 방식은 아직 컴퓨터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인지라, 광고를 내고 우편의 도움을 받아 엽서를 모으는 형태였다고 한다.
그러다 만난 은인이 바로 윌리엄 체스터 마이너 박사, 즉 닥터 마이너였다. 미국인으로 예일대 의대를 나오고 남북전쟁 때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트라우마를 겪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사람이다. 그런데 병의 호전을 위해서인지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살인을 저지르고, 심신미약으로 무죄 판결 후 결국 정신병원이 딸린 감호소에 수감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피살자의 미망인에게 자기 연금을 주며 그녀의 가족을 보호하며 도운 것도 사실이며, 그녀에게 책을 선물한 것도 맞다고 한다.
다만,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둘 사이 애정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닥터 마이너가 스스로 거세를 한 까닭은 자신이 홍등가에서 방탕하게 지낸 과거도 있고, 당시 소아성애를 강요당하는 악몽을 꿨다는 증언 때문이다. 또한 미망인 일라이자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간질환으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결국 둘의 러브 스토리는 허구라고 본다.
그러나 영화가 이 허구적인 러브 스토리를 서사의 근간으로 삼은 까닭은 ‘assythment’ 같은 단어 때문이다. 오늘날은 잘 쓰지 않지만 ‘배상’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영화에서는 닥터 마이너가 제임스 머리에게 정확하지 않지만 ‘오스틴’과 ‘1832’라고 말하며 소리를 지른다. 작가 제인 오스틴은 그땐 이미 죽었으니 그 시절의 저작 중 오스틴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당시 영국 법학자 중 ‘존 오스틴’이라고 법실증주의자가 있다. 그가 강의한 내용을 1832년에 <법리학의 영역확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지만, 곧 교수직을 사임했다고 한다. 공리주의를 철저하게 현실 법으로 추구하려 했던 그의 취지가 당시 도덕관념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닥터 마이너도 괴팍했고 그걸 연기한 배우 숀 펜도 괴팍하기로 유명하다. 그도 ‘가장 자신다운 선택’ 때문에 괴팍하다.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미망인과 자녀들을 위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사망한 남편을 대신하여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미망인에게 ‘배상’을 하기 위해서는, 즉 진정한 사랑으로만 이 배상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죗값을 정확히 치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세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한 여인을 쾌락이 아닌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며 ‘용서’받는 길, 즉 ‘배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 단어는 고대 프랑스어 ‘assez’에서 어원이 유래했고 그 뜻은 ‘충분함’이라고 한다. 이 법률 용어가 영국 문헌에서 실제 사용된 용례는 스코틀랜드 법인데, 풀이는 ‘compensation or reparation for a criminal offense’라고 되어 있다. 범죄 행위에 대한 보상 혹은 배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화 중간중간 사전의 단어 풀이가 나온다. 그리고 셰익스피어(1564~1616)의 작품이나 존 밀턴(1608~1674)의 <실낙원>에 분명히 용례가 있다는 대화를 두 주인공이 자주 한다. 나는 영문학에 대해 문외한지만 맞는 말이다. 거기다가 워즈워스, 콜리지, 블레이크 쯤이 그 시대에서 볼 때는 꼭 찾아야 할 작가들 아닐까.
4. 사전을 만드는 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어국문학 연구를 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사전에는 ‘dictionary’와 ‘thesaurus’의 두 개념이 있다고 하는데, 국어는 전자만 존재하는 셈이다. 후자인 ‘시소러스’는 ‘유의어 사전’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꼭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딕셔너리’가 어휘사전이라면 시소러스를 백과사전이라고 구별하지만, 그건 ‘encyclopedia’라는 다른 원어가 있고, 한자어로도 ‘辭典’과 ‘事典’은 엄연히 다르다. 어휘사전인데도 백과사전처럼 그 말의 관계에 대해 더욱 넓게 다룬 사전, 예를 들어 이 제임스 머리가 추구했던 옥스퍼드 대사전 초판 같은 방식이다. 이제 사전이 종이책이 아닌 웹에서 검색되는 세상이다 보니, 이 의미론적 관계, 역사적 변천, 다양한 문학작품 용례가 정말 중요해진 것 같다.
물론, 용량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수록할 수 있게 되며, 국립국어원도 정식 사전이 아닌 <우리말샘> 같은 개방형 방식을 2016년부터 추구하고 있지만, 온전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 영화로만 봤을 때 어쩌면 제임스 머리가 세상을 백 년 정도 앞서간 것도 같다. 이러한 민중주의적 관점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다룬 영화로는 일본의 <행복한 사전>(2013, 원작 소설 제목은 ‘배를 엮다’(2011))이 있고, 우리에게는 독립운동의 큰 흐름에서 조선어학회 사건과 <우리말큰사전> 발간을 재현하며 민족주의적 관점이 가미된 <말모이>(2019, 이 할리우드 영화와 자국 상영은 같은 해)가 있다.
이 한국 영화를 다룰 법도 하지만 나는 민족주의는 잠시 내려놓고, 식민주의를 표방한 대영제국과 그들의 영어사전 편찬을 다룬 영화를 국어교육계에 소개하는 셈이다. 물론, <말모이>의 덕목은 전국적으로 방언 화자들을 모두 집결시켜 펼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는 메시지 전달이 너무 표면적이라서 아쉽다. 그렇다고 하여 영어사전을 다룬 작품을 통해 보편주의를 추구한다고 치면, 결국 사대주의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앞서 글을 시작하며 주제를 ‘민중주의’로 전환하기는 했지만, 주연 배우로 왜 멜 깁슨을 선택했을까에 대한 언급을 살짝 한 바 있다. 멜 깁슨은 대영제국 비꼬기 영화의 선봉에 늘 나섰다. 어쩌면 ‘식민주의’ 깨부수기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표면에 드러내는 대사도 메시지가 있지만, 그것을 주제로 정하고 표현함에 있어서의 기법적 측면, 그 이면의 마사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시선 중 옥스퍼드를 찍을 때나 런던의 법정이나 의회를 찍을 때는 매우 웅장한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뷰로 촬영하다가, 그 내부로 들어가서 그 건물 안에 있는 교수나 법조인이나 정치인을 찍을 때는 널찍한 공간에 다소 어두운 톤인데 창으로 빛과 먼지가 들어오는 뷰가 많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닥터 마이너가 수감되어 있는 정신병원 감호소의 감방과 비슷한 구조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일라이자가 사는 빈민가 주택과 골목은 항상 어둡게만 그려진다. 영화에서 햇살이 가득한 공간은 교도소에서 닥터 마이너가 친구나 연인을 만나는 산책길과 그 친구 제임스 머리의 작업실 앞 정원뿐이다. 확실하게 대구를 이루는 구조다.
이 영화에서 아무래도 명장면은 제임스 머리가 초판본이 나왔을 때 닥터 마이너가 이 감호소의 의사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그의 족쇄를 보고 그가 정신병자 수감자임을 깨닫는 대목의 대화이다. 대략 이런 식이다. “‘곳간’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 ‘홍두깨’, ‘몸맨두리’도 애틋한 옛말이죠. 난 ‘계집종’이 좋았어요. 미국인과 스코틀랜드인? 옥스퍼드와 예일? 천재와 미치광이? 그런데 둘 중 누가 누구죠?”
둘은 그렇게 ‘대구 놀이’를 하다가 친구가 된다. 말의 의미를 정의하고 용례를 찾는, 말놀이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바다에 그물을 널리 들이우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는 대사는 일본 영화의 원작 ‘배를 엮다’에서 나올 법한 문장이다. 언어의 세계, 특히 단어의 세계, 즉 어휘는 흔히 바다에 비유된다. 그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함께 배를 타고 가되, 방향을 잡고 나가는 선장이 있다면, 배를 멈춰 세우고 그물을 내리는 작업을 하는 선원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언뜻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한글창제로 토론할 때 세종에게 정기준이 "백성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만나 적 있느냐로 질문하는 대목도 떠오른다. ‘바다’는 ‘언어’이자 ‘민중’이다.
5. 탈-식민주의라는 토대
이 영화에서 또 다른 대구, 아니 대조의 방식이 있다면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탈-식민주의’와 그것의 대체재로 표현되는 ‘민중주의’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멜 깁슨은 젊었을 때는 전쟁 영화에 특화된 배우이다. 완전 마초남인데 그걸 뒤집으려고 만든 작품이 <웟 위민 원트>이다. 그때 느낌과 닮았다. 마초인 줄만 알았는데 스윗가이로 나온다. 그동안 ‘무사’로만 알았던 아저씨가 사전을 만드는 ‘말(글)쟁이’로 나오다니.
그것도 반전이지만, 이 영화는 대영제국,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사실 위선적인 지식인일 뿐, 그들은 제 잇속만 차리는 속물에 불과하고, 딱 봐도 스코틀랜드 촌뜨기에 무학력에다 나막신 춤을 출 것 같은 아저씨가, 그 영국연방이라는 세계를 지탱하는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심지어 죄수이며 정신병자와 소통하며 편견 없이 수집해 나간다. 식민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모두 극복해내는, 한 고귀한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훗날 명성을 얻고 난 후에도 정교수는 되지 않았고, 계속 사전 편집자로만 일을 했다고 알려진다. 말년에 유언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무명이다. 메아리나 무리수로 취급하든가 아예 무시하고, 다만 사전만 기억해주길.” 그럼에도 제임스 머리가 이 영화에서 ‘프로페서’로 불린 것 자체가 흥미롭다.
제국주의를 펼친 입장에서도, 그 지배를 받으며 식민지 경험을 한 입장에서도, ‘제국(식민)주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라는 주제가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화두가 되었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로 불리던 이념의 일부도 포함이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역사라고 인식되던 사실도 새롭게 보자는 실증주의적 관점인 ‘신-역사주의’가 21세기 이 큰 흐름에 이론을 제공했다. 포스트모던한 ‘문화연구’와 함께 유행하며 최근까지도 학풍을 이루었다.
잘 생각해 보니 나도 대학원에서 한창 공부할 때 실증적인 사전 작업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 만났던 지도교수와 동료들이 어쩌면, 나에게 제임스 머리이기도 하고 그의 후견인 프레디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친구인 닥터 마이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물론 당시 지도교수가 발간한 그 사전은 한 작가의 어휘사전이니 문학연구라고 볼 수 있지만, 어학적으로도 인문학적으로도 사회과학적으로도 정확한 사전이라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지독하게도 정확하고자 했던 지도교수 덕분에, 우리도 지독한 연구자로 나름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머리의 후임이라고 할 수 있는 헨리 브래들리는 실존 인물인데, 그를 연기한 배우 이안 그루퍼드(개인적으로 <판타스틱 포>와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기억)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전 작업할 때 내가 그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브래들리가 다른 조수와 다툼을 벌이다가 ‘apology’라는 메모지를 건네며 화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그렇게 함께 작업한 동료가 있다. 앞서 글을 시작할 때는 후견인과 절친이 있는 제임스 머리가 부럽고, 나는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을 마무리하며 이제 그 말은 취소한다.
6. 국어사전에 대하여
이제 다음주 강의에서 이 영화에 대해 국어교육적 의미를 언급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말도 현재 사전 작업에서 여러 성과가 있다. 한글학회(연세대-최현배)의 <우리말큰사전>(1957)에서 시작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이어 <고려대한국어대사전>(2009)까지 한국어는 ‘대사전’으로 세 종류를 가지게 된 언어이다. 북한(김두봉, 이극로 등)까지 치면 <조선말대사전>(1992)과, 함께 만든 <겨레말큰사전>(2004)까지 다섯 종류다.
조선어학회로부터 이어져 남한만 보면 대학교와 출판사(동아출판-양주동(동국대), 민중서림-이희승(서울대), 금성출판-김민수(고려대))에 따라 다양성을 갖춘 한국어 어휘 세계를 구축한 셈이다. 대학도 SKY가 있듯 대사전도 그 학풍마다 색깔이 다르다. 한때 포털도 네이버-표준/다음-고려대로 양분해서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어느덧 공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 시점에서 최고의 사전이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대사전도 뭔가 열등감에서 시작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우선, 영어라는 언어가 섬나라가 독자적으로 썼다기보다 유럽 대륙으로부터 온갖 외래어의 영향으로 형성된 ‘잡탕’이라는 인식이 살짝 있었다. 유럽의 언어에서 어원 연구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어의 유래는 인접국도 중요하겠지만, 시간적으로도 성서를 구성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부터 모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거기다가 미국이란 신생국(1783)이 영어를 더 잘 연구해서 철자법 규범을 먼저 만들며 영국식에서 미국식 영어로 분화를 시작했다. 그 시기 미국은 언어 천재 노아 웹스터(1758~1843)가 그 유명한 <웹스터 대사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니 영어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언어들과 경쟁하며 동시에 같은 영어라도 미국에도 밀린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건 그냥 되는 게 아니었다.
영국에도 물론 사전이 있기는 했다. 사무엘 존슨 혼자서 1747년에 시작해 1755년에 발간한 사전인데, 걸작이지만 그 한계가 분명했다. 그 문제의식을 갖고 옥스퍼드대학 출판국이 공동작업의 사전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멘트가 설득력 있다. “어휘의 범위와 편찬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영어를 책임질 구세주’로 제임스 머리가 등장한다. 참, 멋진 표현이다.
결국, 영국의 영어도 엘리트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노력’으로 이룩해낸 결과라는 말이다. 그 영국의 영어가 전 세계의 공용어가 되기까지는 그냥 자연스럽게 얻어진 게 아닌, 그만큼의 노력이 들었고, 그 중 하나가 언어를 집대성하는 ‘대사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걸 한국어에도 적용하자면, 한국어도 지금 K-열풍에 힘입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그러니까 돌아가신 세종대왕님의 은덕으로, 널리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란 상상은, 착각이다. 한때 한국어교육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유행했다.
그 시절 대학생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한글 보급이나, 세종학당으로 불리는 한국어교육센터가 생겨 중국, 몽골, 베트남 등 동아시아 중심으로 붐을 일으킬 줄 알았다. 내 선배와 친구들도 코이카나 여러 단체를 통해 한국어를 가르치러 해외로 나갔다. 그중 기독교 선교를 그 배후로 삼아 나간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지금은 방만한 경영과 관리 부실로 비판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제임스 머리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 같다. 영화 안의 옥스퍼드 출판국에서 항상 그를 반대하며 어떻게든 자리를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들이 내놓는 다른 사업은, 킹 제임스 성경(KJV, 1611, 옥스퍼드가 1675년부터 왕실로부터 인쇄권을 부여받음)의 번역과 판매였다. 그렇게 성경 출판이 상업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는 대영제국의 제국주의가 20세기 초반 아시아 아프리카로의 기독교 선교에 좋은 방향에서든 나쁜 방향에서든 영향을 끼친 것에 주목한다.
7. 부부, 가족, 친구, 사람
위선적인 사람들이 늘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보급하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거나 그렇게 삶을 살지도 않는다. 그러나 제임스 머리는 항상 집 식탁에서 가죽 끈에 새겨놓은 성경이나 <실낙원> 구절을 묵상하며, 그 구절 때문에 아내와 토론하다가 다투기도 한다. 친구인 닥터 마이너가 회개하여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신의 뜻을 묻게 된다. “만약, 사랑이라면 어쩌죠? 구원받을 기회를 잃는 거죠?” 사랑으로 갈등하고 있는 친구와 그의 연인이 주고받은 메모를 보며, 이 부부도 대화를 주고 받는다.
나도 요즘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 그때마다 아들들이 묻는다. ‘아빠 엄마, 싸워요? 아니, 아빠 엄마 대화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 제임스 머리와 아내는 ‘여왕과 광대’라고 서로 불렀다. 아빠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이 공부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는 아내는 지쳐간다. 돈을 왕창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 일이 단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가야 할 숙제다. 그러니 남편은 아빠는 늘 그 일에 미쳐 있다. 집에 잘 안 온다, 집에 와도 그 일을 하기 위해 쉬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남편은 아빠는 광대처럼 아내와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내는 엄마는 더욱 엄격한 여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걸 요즘 육아하며 진실로 깨닫는다.
제임스 머리의 실제 신앙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국교회(성공회) 신앙의 테두리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땠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배우 멜 깁슨은 어떤 작품에서든지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요즘 인상평이다. 직장에서도 힘들고 가정에 와서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자신 때문에 지쳐가는 가족을 보며 미안하고, 이 일과 공부를 과연 왜 하고 있는지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마다 제임스 머리가 "주님, 도와주십시오. 길을 잃었나이다."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친구 닥터 마이너에게도 ‘선함과 인자함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라는 시편 구절을 서로 주고 받으며 믿음을 권유한다. 이 믿음대로 둘의 우정관계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결국 사망의 위기에서 닥터 마이너는 제임스 머리의 노력 덕분에 구원을 받는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젊은 윈스터 처칠을 설득해 그를 본국 미국으로 추방시켜, 계속 서신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임스 머리는 T까지, 닥터 마이너는 V까지 편찬을 함께 했다. 그 노력으로 탄생한 결과가 위대한 옥스퍼드 대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