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든 미쿡이든, 학교는 다 X까라 그래!

- 영화평 11 <돼지의 왕>과 <디태치먼트> : 공교육에 대하여

by 보이는 말들

1. 들어가며


아무래도 방학이고, 이제 이 <보이는 말들> 시리즈도 마무리하는 시점이라 그런지, 말이 좀 막 나갔다. 물론, 내 말이라면 책임을 져야겠지만, 영화의 대사이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혀 짧은 권상우가 ‘옥땅으로 따라와’와 함께 시전한 명대사이다. 결코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사실 근무하는 학교가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고, 동문회를 통해 이 작품을 만든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보려 시도한 적도 있다. 지금은 명문고라고 불리지만 과거가 화려한 나의 직장에서 ‘대한민국 공교육’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물론, 노골적인 이 영화를 다룰 생각은 없다. 이 작품이 소설이든 영화든 웹툰이든 ‘학원물’ 서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아무래도 ‘옥상 혈투신’이라 본다. 그 시절 학교 옥상은 흔히 녹색 방수페인트의 외양과 쓰지 않는 책걸상 방치 용도로 기억된다. 요즘 금연 구역이 된 학교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교직원 흡연 장소이다 보니 옥상은 관건이 철저하다. 영화 속 그 옥상은 현실에서는 구청 지원 예산으로 천문대가 설치되어 서울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있는 핫플이 되었다. 역설적이다. 학창 시절 패싸움의 전장에서 별이 빛나는 밤이라니 말이다.


2. 드라마 <돼지의 왕>


딱 그 느낌으로 다가온 작품이 지금은 실사로 건너간 연상호 감독의 첫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이다. 첫 장면에서 아내를 죽이고 바라본 거울 속 자화상이 돼지로 바뀌는 것도 충격이지만, 엔딩에서 초점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며 “이곳은 얼음보다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의 대사로 끝나는 게 더 충격적이다. 그때 영화의 초점은 아마 학교 옥상에 있었을 것이다. 연민이고 위로고 다 필요 없고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는 듯한, 카메라 앵글과 차디찬 톤의 내레이션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그때 하늘은 별이 빛나는 밤이라니. 모든 죽어가는 걸 사랑하기는커녕, 나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각만이 든다.


이 애니메이션은 10년이 훌쩍 지나 실사 OTT 드라마로 리메이크가 되는데, 원작을 능가하는 작품이라고 보인다. 내 평가가 아닌 이동진 형님의 극찬이 근거로 남아 있다. 간단히 말하면 두 사람이 죽은 친구를 놓고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다가 한 놈은 죽고 한 놈만 남는 이야기를, 그 한 놈이 죽기 전 복수극을 펼치고 나머지 한 놈이 형사가 되어 수사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지며 두 사람이 모두 죽는 이야기로 바뀐다. 과거만 캐던 이야기에서 현재가 박진감 있게 살아나며 다른 인물들도 여럿 달라붙고 더 부피가 커진 서사로 잘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가 이 드라마를 인정하는 까닭은 한국 학교폭력 서사 계보에서 ‘우화’의 극단을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우화인가? 인간사를 동물로 빗대는 이솝의 이야기, 그 우화가 맞다.

사실 반대급부가 있어서다. 이 드라마가 작품성이 있음에도 그리 흥행하지 못한 까닭은 경쟁작 때문이다. 플랫폼이 티빙과 넷플릭스, 주연배우가 이쪽은 김동욱과 김성규에 채정안이 붙어도, 저쪽은 송혜교가 있고 작가가 김은숙인데, 솔직히 경쟁이 안 되었다. 그런데 2022년의 대작 <더 글로리>(물론 시즌 1이 그렇고 시즌 2는 2023년에 공개)와 이 작품이 붙었다. 흥미로운 게 그 해가 유독 ‘학폭’ 주제가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법정물 <소년심판>이나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가 기억난다. 대체로 OTT 서사가 나아갔던 방향은 합법적 수사와 처벌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사적 심판을 단행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것이 대중의 욕망이란 뜻이다. 현실에서는 정치인의 자녀나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전력을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학폭 미투’가 일어났다. 현실과 허구가 어느 정도 뒤섞이던 시기가 바로 2022년 즈음이었다.


<더 글로리>는 워낙 유명하니 작품 자체의 언급을 삼가지만, <돼지의 왕>과의 비교만 하겠다. 1화가 기억난다. 문동은이 박연진의 딸 예솔이 담임교사가 되어 그네를 밀어주며 이 대사로 끝난다. “이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우화거든.” 그런데 이 작품은 이 약속을 어겼다. 우화를 표방한 것,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하는 이야기는 인정할 수 있다. 악한 자들을 징벌하는 권선징악은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교훈성은 우화든 동화든 원래 비슷하다. 문제는 그 악한 자들을 혼내려고 만난 선한 듯 악한 듯한 남자와의 로맨스, 이놈의 로맨스가 문제였다. 이건 연진이 남편 하도영을 “그냥 개새끼가 아닌 나이스한 개새끼”로 부르는 것마냥, 로맨스 판타지는 아무래도 동화와 더 가깝다. 의사 주여정을 “칼춤 추는 망나니”로 표현하긴 했지만, 문동은이 “왕자는 필요 없다”고 한 말은, 이 작품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임을 반증한다.


3. 우화와 동화


사실 <신데렐라>라는 동화는 프랑스로 넘어오며 샤를 페로의 ‘유리 구두’ 이야기로 변화되었을 뿐, 독일 그림 동화에서는 ‘황금 구두’와 ‘피 흘리는 발’과 ‘재투성이’가 강조된 <아센푸텔>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미국 디즈니로 넘어가서는 ‘호박 마차’니 ‘비비디 바비디부’ 같은 마법 이야기로 변질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전래동화에 있어서 가장 권위를 지닌 판본은 그림 형제의 책이다. 그리고 그걸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브루노 베텔하임은(비록 그의 인생은 위선자로 마감되었지만, 홀로코스트 경험만큼은 진실되었다고 보므로, 그의 자폐아 연구에 있어서 동화 적용은 진정성 있었다고 평가) 이솝우화보다 전래동화가 내면의 성장에 유익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비교 사례로 <개미와 베짱이>와 <아기 돼지 삼형제>를 들 수 있다. 둘 다 교훈을 준다. 그런데 베짱이를 쓰레기 취급한 개미 같은 인간은, 본인이야 성실하지만 같이 지내기엔 재수가 없다. 그런데 돼지 셋 중 불성실하지만 솔직한 ‘욕망’은 제일 먼저 죽고, 노력하지만 어설픈 ‘자아’도 결국 죽고, 마지막으로 인내하며 ‘초-자아’를 달성한 자만이 인격을 평가받을 수 있다. 한 인간 안에서도 갈등하며 통합에 이르는 성숙의 세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두 단계가 죽음에 이르러야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이 원작의 가치를 모른 채, 두 돼지를 살리고 심지어 삶아 저녁거리로 먹는 ‘늑대’마저 살려주는 각색이란, ‘우화보다 못한 유사 동화’로 전락한 꼴이다.

좀 길게 이야기를 끌었는데 결론은 내리자면, 우화는 이솝우화처럼 우화다워야 하며, 동화는 그림동화처럼 동화다울 때 이야기의 매력이 살아난다. 유사 동화든 유사 우화든 짬뽕이 되는 순간, 이야기의 가치가 확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이든 실사 드라마든 ‘우화’에 충실한 작품이다. 특히 김대진, 김상우 감독의 드라마는 ‘돼지와 개(늑대)’ 우화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개들에게 복수한 돼지들이 함께 죽는 결말을 통해, 어쩌면 셋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여운을 남기며, 비극적인 동반자살이 행복한 학창 시절을 꿈속에서나마 상상하는 동화로 마무리된다. 아련한 엔딩이다. 우화의 비극성이 최대치를 달성하니 묘하게 동화로 전환되는, 나로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작품이다.



4. 개/돼지 사람 만들기


잠시 나의 교직 생활 이야기를 하겠다. 이제 한 학교에서 10년을 근무했다. 그전에 3년, 4년 있었던 두 학교와는 달리 이곳은 정규직이고, 그래서 이제야 나도 부장교사를 달게 되었다. 최대한 핑계 대고 피하며 미뤘던 일이다. 물론, 육아도 했고 공부도 했다. 그새 18년차 교사가 되었는데 담임도 오래 했고 어느덧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도 익숙하다. 그런데 책임지는 일을 하는 건 처음이다. 이제는 후배 교사들을 섬기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데, 두려움이 앞선다. 사실 어떻게 해야 교육을 잘할 수 있는지, 가정에서 내 자녀 양육도 솔직히 안 되는데,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교과목을 가르치는 일 말고, ‘개와 돼지들을 사람으로 키워내는 일’ 말이다. 물론, 내 말이 아니라 영화에서 나온 표현이다.


대학에서 교육사회학을 배울 때 학력자본, 문화자본, 아비투스(취향), 재생산, 구분짓기, 상징권력 등의 화두를 던지던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프랑스 학자가 기억난다. 결국 학교라는 공간은 ‘개/돼지’로 계층을 구분지어 ‘사람’을 만들겠다는 허울만 있을 뿐, 실제로는 ‘괴물’을 만들고 있는 제도에 불과한 셈이다. 이 영화에서도 ‘왕’이니 ‘신’ 같은 말로 상징권력이 부여되는데,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서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명대사가 떠오른다. 그 괴물 만들기 작업을 우리가 지금도 계속하고 있을 수 있다. 물론, 교육을 학교가 홀로 하는 건 아니다. 부모와 가정, 사교육과 대학, 기업과 정부, 우리 사회 모두가 ‘교육’에 관여하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중심(어쩌면 주변으로 밀려나 중심이 이미 아닌데도 여전히 책임지는)에 학교가 있기 때문에, 교사는 오늘도 교육을 고민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몇몇 단체가 떠오른다.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송인수),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이찬승), <드림터치포올>(최유강),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준석). 내가 아는, 학교가 아니고 학원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안교육도 아닌데, 학교와 학원을 연결해서 어떻게든 교육을 새롭게 해보자는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들이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지만 다들 부침이 있다. 나는 왜 이런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밥벌이 때문이다. 그래, 교사는 철밥통이다. IMF 이후 21세기 초반까지 분명 교사와 공무원으로 몰렸다. 그러다 2020년 넘어서며 몰락했다. 코로나 때문도 있고 저출생과 학령인구 감소에다가, 학부모 민원과 교권 추락까지 이제 학교를 떠날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능력만 되면 이직해야 할 텐데, 왜 나는 교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5. 영화 <디태치먼트>


“바꿀 수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다.” 이 미국 영화 <디태치먼트>(2011; 2014)의 주인공 헨리 바스(애드리언 브로디 분)가 다른 교사들과 달리 교직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인터뷰 때 말한 대사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오바마 정부 시절 공교육에 대한 반성과 개혁을 시도하던 미국을 투영하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선망하던 미국 교육이란, 사실 소수 엘리트를 위한 수월성 교육을 다수 대중이 인정하는 대신, 보편 교육을 약화시킨 형태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학은 세계 최고이지만 미국 공교육은 주 단위별로 좀 다르겠지만 형편없다는 게, 다큐 감독으로 유명한 토니 케이의 관점이다. 배경은 뉴욕주 외곽의 공립고등학교인데 인종은 다양하게 섞여 있다. 조연으로도 크리스티나 헨드릭스, 마샤 게이 하든, 루시 리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 나온 걸 보면, 당시 미국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고 본다. 사실 지금 트럼프의 미국,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의 미국이란, 이때부터 민주당의 진보정책에 대해 공화당과 보수세력이 나름의 불만을 축적해 왔다고 여겨진다.


우리도 올해 지역 교육감을 새롭게 선출할 것이다. 교육에도 진보냐 보수냐 이념이 분명히 존재한다. 단순히 수월성 교육이냐 평준화 혹은 보편 교육이냐로 언론은 도식적으로 보도하지만, 복잡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따로 공부하고 나중에 언급하자. 나는 어쨌든 현재 공교육에서 일하는 정규직 부장 교사이다. 왜 굳이 직함을 밝히냐면은 이 영화가 정규/계약직의 은근한 갈등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내 직장에서 10년 전 이 영화를 함께 보고 교무실에서 감상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반응이 크게 세 부류였다.

A는 50대 남자 부장 교사 왈, ‘영화가 너무 우울하다’였다. 그 시절 그분의 교사 생활 말년이 우울해서 그런 듯하다. B는 40대 남자 기간제 교사 왈, ‘교사가 학교 밖 청소년과 이성교제를 할 수도 있는 건가’였다. 이 영화의 가장 첨예한 지점을 건드린 셈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세 여자와의 관계로 주목받는다. 동료 정교사와의 ‘썸’은 계층 차이로 깨지고, 제자로서 아껴준 여학생은 이성적 호감으로 오해해서 ‘자살’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매춘부 소녀는 보살펴주다 보호소로 보냈다가 다시 찾아가는 애매한 ‘관계’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C는 30대 여자 정교사 왈, ‘완전 젊었다면 멋있다고 했을 텐데, 솔직히 겉멋만 들고 사생활도 불투명하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문제 교사이다’였다. C교사의 평가가 나에게도 일침을 주었다.



6. 교육적 거리두기


그래, 맞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영화 속 멋진 교사는 현실에서 문제 교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 옛날 <죽은 시인의 사회>(1989) 속 키팅 선생님도 학생들에게는 ‘오 마이 캡틴’이었지만, 제자 닐을 자살로 내몰았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셈이다. 이 지점에서 나도 어느새 부장 교사의 마인드가 된 것인가 자문한다. 나도 조직생활을 하다 보니 마냥 멋있기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가정에서도 가장으로서 그렇다. 어느덧 보수적으로 사람이 바뀌고 있다. 물론, 이것도 다 핑계일 수는 있다. 그래도 교사로서 아빠로서, 한 해 한 해 버텨나가며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를 실천하고자 애를 쓸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란, 교육에 있어서는 그 정도의 수준인가 보다.

이 영화는 제목도 한국어로 번역하지 못할 만큼 ‘미쿡 영화’다. ‘Detachment’는 ‘무심, 초연, 냉담, 분리’ 등으로 번역 가능한데도 말이다. 이 영화로 사범대 학부 4학년 강의하던 2022년 교생실습 다녀온 친구들에게 비평문 과제를 받았는데, 그들은 이른바 ‘코로나 학번’인 2020~2021학번보다 선배인 2017~2019학번들이었다. 차이라면 대학의 낭만을 절반 경험하고 코로나의 단절을 절반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들의 비평문의 공통점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교육적 거리두기’로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열정으로 가득찬 교사가 아니라 냉정함을 유지한 채 학생들에게 무심한 듯 초연하게 가르치는, 주인공 헨리 바스 같은 교사 말이다. 어쩌면 교사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덕목 아닌가. 어태치먼트(attachment)에 질린 우리는 이제 디태치먼트를 원한다. 특히 학부모 민원에 시달리며 인성교육의 요구를 받는 교사라면 말이다. 나도 언제부턴가 ‘츤데레’가 되려고 할 뿐인데, 어쩌면 그게 내 생존전략이었던 게다.


그렇게 츤데레며 디태치먼트한 주인공 헨리 바스에게도 변화는 찾아왔고, 그 변화를 계기로 결국 교직을 떠난 듯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교사-제자의 관심을 남자-여자의 사랑으로 오해한 여학생이 상처를 받고 자살하는 사건이다. 사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한 학생이 이제 학교에서 교사와 친구들의 사랑만으로, 힘든 청소년 시절을 버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건 형제자매가 많던 베이비붐 세대나 가능했다. 이제는 학교의 교육이 가정의 양육을 넘어설 수 없는 사회구조다. 아니 학교 공교육은 학원 사교육도 넘어설 수 없다. 그만큼 개인주의화된 사회이다. 그런데도 헨리 바스는 자신의 책임감을 느낀다. 아마 이 영화 시작할 때 카뮈의 소설 <전락>의 문장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나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를 칠판에 판서하는 장면이 나오는 까닭은,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양심고백이 영화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의 양심 혹은 부모의 양심이 뭐냐고 물으면 ‘아이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어른이 되기 위한 가이드”라고 표현되었다.


7. 나가며


나도 학교에서 농반진반으로 학생들에게 왜 학교에 나오는지를 묻는다. 수능 잘 쳐서 대학 잘 가려면 고2때까지는 자퇴해서 검정고시나 학원을 가면 좋을 텐데, 왜 굳이 불만 가능한 학교로 나오느냐면서 말이다. 대부분 학생들의 답은 ‘졸업장’이고, 교사인 나의 답은 ‘점심’이다. 부모님이 밥 차려주기 힘드시니, 오전수업은 밥 먹으러 등교하는 것이고, 오후수업은 밥 먹었으니 하교할 때까지 밥값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밥값’이라는 화두 안에 여러 의미를 담아내려 한다.


“Ubiquitous Assimilate(어디에서나 동화되는), Doublethink(이중사고)”라고 영화에서 표현한 게 우리가 말하는 인성교육이라면 동의한다. 학교 공교육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학교와 세상은 다르다. 세상은 만만치가 않으니, 학교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식이든 사회성이든 힘을 길러야 한다. 졸업하고 어디 가서 이용만 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 의미에서 한국이든 미쿡이든 학교 공교육은 X까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결코 X에 젠더적 의미를 부여하진 않겠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아이로만 살지는 않는데, 언젠가 자라서 X까고 세상 험한 꼴 경험하며 어른이 된다는 차원에서 내면 성숙을 의미한다.


다만, 그 성숙의 과정이 우울한 건 현실이다. 학교는 우울하다. “우울함이 내 영혼을 압도했다. 나는 그곳의 음산한 벽과 단순한 풍경들을 보았다. 나의 우울한 영혼과 썩어버린 나무의 허여멀건한 줄기를 보았다. 그것은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이었다.” 영화의 엔딩신은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의 문장으로 끝난다. 6월이면 교육감 선거에서 ‘꿈과 희망’이라는 말을 잔뜩 입에 담을 테다. 나는 그 말을 내뱉는 만큼 비중으로 ‘교육의 우울’에 대해 ‘냉정함’을 지닌 리더를 기대한다. 학생이든 부모든 교사든 거짓말은 싫기 때문이다.



* 출처 : 이 글은 기존에 발표한 나의 학술논문 두 편에 의지하여 썼다.

https://doi.org/10.35832/kmlc.82.202406.7

https://doi.org/10.37192/KLER.81.5


** 후기 : 이제 ‘보이는 말들, 아니 보이지 않는 말들’은 2월 마감할 계획이다. 2월은 겁이 날 정도로 바쁘다. 처가댁에 팔순이 있어 제주로 대가족 여행을 간다. 그리고 개학하면 정신없을 듯하다. 그 사이 아이들 처음으로 스키강습을 예약했다. 설날에는 본가 대가족여행으로 타이베이를 간다. 이 여행의 빌미는 딱히 없다. 전쟁은 미중회담 전에는 안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대만 영화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다음 학기 교육대학원 강의는 좀 빡세다. 각오하고 있고, 이참에 학술대회 발표를 신청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갈까. 그런데 그 와중에 멈춰서는 시기가 있을 듯하다. 한 친구의 기일이 중간에 있다. 사랑했던 친구를 작년에 떠나보냈다.


아직 어색한 친구의 죽음, 이 경험으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영화 <경주>를 또 보게 될 것 같다. 도대체 뭐가 보이고 뭐가 보이지 않는지, 뭐를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지, ‘말’은 그러고 보면 본질이 ‘비밀’인 것 같다. 사치스럽지만 내 아이만큼은 스키를 가르치려는 부모의 마음은 ‘상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새 학기라 노르웨이인지 스웨덴인지 그들의 숲 이케아 한번은 들르겠지. 가구를 보며 숲을 떠올리다니 비틀즈도 참 속물이다. 나도 속물이 되었다. 교사의 로망 방학 때마다 가족 데리고 여행이나 다니다니.


어제 아들이 질문했다. 이름이 치히로(千尋)에서 센(千)으로 바뀌는 게 왜 ‘행방불명’이냐고. 대답하며 나도 속으로 나에게 답했다. 지금 아빠가 그렇단다. 어쩌면 ‘보이는 말들’과 ‘보이지 않는 말들’ 사이의 삶이란 행방불명과 같다. 말들의 행방불명, 생각의 행방불명, 상실, 비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언어의 바다를 건너는 ‘사전’이란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