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운전석 앞유리를 가로질러 녀석이 유유히 기어간다.
차갑고 쓴 생명수가 담겨 있는 내 텀블러 위에 올라앉았다가, 퇴근 후 저녁 설거지를 하는 내 어깨 위에
스멀스멀, 늦은 밤 잠을 청하는 내 이마 위에도 불쑥 나타나더니 능청스럽게 지나간다.
“깨톡” 세상 가벼운 알림으로 묵직한 공지사항이 날아왔다.
‘다음 글모임의 키워드는 달팽이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나가는 글쓰기 모임의 주제어를 듣고 난 후, 시도 때도 없이 달팽이가 나타난다.
주변을 배회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덥석 잡지 못하고 며칠 째 대치중이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천천히 허공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를 집어 든다.
우리는 모두 365번의 24시간이 지나면 자동 배급된 한 살을 먹는다. 그렇게 사십여 번의 배식을 받는 동안 학업을 마쳤고 직업을 가졌으며 사랑을 했고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지금은 비슷한 또래의 대부분이 그렇듯 내 DNA를 물려받은 두 생명체를 키우며 고군분투 중이다.
이제는 상품의 성분표를 보려면 팔을 조금 더 펴야 하고, 앉았다 일어나려면 겁 줄 사람도 없는데 기합을 넣고, 아침에 거울을 볼 때면 떨어지는 사과가 아닌 얼굴의 처짐으로 중력을 깨닫는다.
나의 나이 듦은 사회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정상 속도를 유지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 뒤 한참 뒤떨어진 곳에서 내면의 자아가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느릿느릿, 어기적 거리며 따라온다. 느리게 성장하는 나의 정신연령은 주민등록상 나이의 절반 정도라면 후하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건 느림보들의 자기 위로가 아닐까. 적어도 나의 느림은 ‘미’를 가지기 못한다. 푸근하고 성숙한 ’ 으른미‘가 없는 나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어설픈 중년이 되어있다. 넓은 초원의 휴식 같은 아름드리나무가 되기를 꿈꾸지만 정작 나의 모습은 잔가지 하나 없이 바람에 쉬이 나풀거리는 강아지 풀이다.
갓 스물의 어디쯤에서 아직 서성이고 있는 자아로 인해 개구지고 철딱서니 없는 성격을 유지 중이다. 중년의 지혜로움과 넉넉함은 애석하게도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연륜이 느껴지는 말주변으로 상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하거나, 위기상황에 닥쳤을 때 먼저 나서서 착착 상황을 해결하는 믿음직한 어른, 주변 사람들을 두루두루 챙기고 가진 것을 베풀 줄 아는 어느 댁 맏며느리 같은 포용력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일단 자기 계발서를 때려 읽는다.
천천히 기어간다. 느리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내 안의 달팽이 같은 자아가 결국은 도달할 그곳.
푸르른 초원, 살랑거리는 연둣빛 강아지 풀, 그 위에 맺힌 어른의 이슬 한 방울 냠하고 먹게 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