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아 서식지

melancolía microhabitat 내 집의 신비한 세입자

by 닥터 로

Mi manchi Quando il sole da la mando all’orizzonte…


케니 지(Kenny G)의 색소폰 전주가 석양빛 하늘을 그리면 웅장한 나무의 가을 낙엽 같은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의 그리움이 지상에 가득 쌓인다.


미마-안끼 꽌도일 쏠레 달~라~ 마-안도오 알로리쫀떼… 에뚜우, 에에뚜우우우~


“나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태양이 수평선에 걸렸을 때도… 세상의 소리들 어둠에 덮혀 고요한 때에도… 그대 그리는 마음은 그림자처럼 내게 엉겨 붙어 있네요.”


보첼리의 미만끼에서는 눈물 냄새가 난다. 그래서인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빗소리와 무채 수묵화 빛 하늘의 무게가 땅을 적실 때 듣는다면 누구나 눈물이 저절로, 그것도 하염없이 흐르고 말 거다. 내가 그랬다. 언어도 모르고 번역된 가사도 없었지만, 모국어처럼 알아들었고, 노래가 끝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조차 심장을 파고든 여운은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이 음악이 목구멍 깊은 곳 어딘가쯤을 무조건 반사하듯 먹먹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은 무한 반복으로 지칠 때까지 듣곤 했다. 이제는 눈물샘 근처에 근육이 생겼는지 울고 싶을 때만 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고요로 가득한 어떤 밤은 마음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내 가장 깊은 곳의 사람은 중력을 잃고 여기저기 못가는 곳 없이 떠다닌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멜랑꼴리아(melancolía)의 숲을 길을 잃은 듯 걷고 있다. 길을 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없는 사람… 돌아올 수 없는 사람… 돌아올 리 없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내가 도착할 때 즈음엔 어김없이 그는 그곳을 떠나있다. 온기조차 없는 것이 자리를 뜬 게 오래인 건 확실하다. 우리의 재회는 이뤄지지 않는다. 해후(邂逅)도 기대하기 어렵다. 없지만 있고, 있어도 결국은 없다. 멜랑꼴리아 숲의 시계는 그와 내가 우리였을 때, 우리가 두 팔 벌려 서로를 안아주던 10시 10분에 멈춰있다. 타임 레포트(time report)의 투입과 산출처럼 예측이 맞아떨어지거나 가능하면 좋으련만 결코 맞아 떨어지는 법 없이 빗나가기만 한다. 종(縱)과 횡(橫)의 시간, 크로노스(chronos)도 카이로스(kairos)도 어긋나 무의미해져 버린 숲의 시간 속 진공은 좀처럼 멜랑꼴리아가 차지할 공간도 숨 쉴 공기도 쉽게 허락하진 않는다.

멜랑꼴리아는 상실의 부정(否定)이다. 잃어버렸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잊기 싫은 것이기도 하고,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랑꼴리아는 내 집에 은신하고 있는 이상한 세입자 같다. 이 세입자는 버젓이 세도 내지 않고 이사도 갈 생각이 없이 제집처럼 산다. 어떨 때는 주인 행세까지 한다. 세입자가 막무가내여서가 아니라 이건 순전히 집주인 때문이다. 주인은 얼핏 호구인 듯 보이지만 그래도 꿍꿍이도, 중정도 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유여서 그렇지 집주인에게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집주인은 무상거주 세입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당분간은 오래도록 내보낼 생각이 없기까지 하다.

자본주의의 폐허 속 다수에게는 희망, 소수에겐 욕망의 이름으로 파종된 ‘집’이란 종자(種子). 그래서 누군가는 결국 자기만의 가난을 수확할 것이고, 호황인 누군가는 허영과 사치의 삶이 어떤 곤란을 초래할지 모르는 채, 두 부류 모두 아비투스(habitus)에 장악된 삶을 살며, 아마도 행복보다는 결핍 가까이 사는 이웃들과 함께 일 것이다. 그런 이웃을 많이 만나서인지 나 같은 소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은 간절하고 절박한 꿈이기까지 하고, 그 집을 마련하려다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되기 쉬운 세상인 게다. 이 ‘집’이 그 ‘집’이 아니더라도 매한가지이다.


어쨌든 나와 내 안의 멜랑꼴리아, 이 둘의 사이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몰 경제적인 이상한 관계이기는 하다. 그렇다. 바보 같지만 내 안에는 멜랑꼴리아가 미소(微小) 은신 거주 중이고 나는 일부러 방관 중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집주인이 나뿐이 아니라는 걸. 게다가 대다수일 거라는 것도. 또 주객이 전도될 만큼 큰 상실의 아픔과 깊은 상실의 부정(否定)에 집을 통째로 내주고도 모자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도 많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나 정도는 후 불면 털어질 먼지 같은 상실로 호들갑에, 거창하게 떠벌리는 무용담에, 거기다 감정의 사치를 부리는 중이라는 것을.

집 안은 그와 보낸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부산물들로 가득하다. 그와 보냈던 시간의 5분의 1이 그도 없이 지난 지금, 그만큼은 떨구었어야 할 것들에 오히려 흙먼지 먹은 낙엽이 쌓여있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는 날에는 레인 애프터(rain after) 향이 난다. 작은 빗방울들이 흙에 톡, 토독 떨어지기 시작하고, 제 몫만큼 포물선을 그리며 잔디처럼 피어날 때, 수줍게 신이 나 푸실 뛰어오르는 흙먼지. 작은 비가 내리는 날, 습기 사이로 스며들어 존재는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잔향. 찰나에 갇힌 영원의 향기. 흙 향 미스트.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사실 꽉 끌어안고 있다. 나는 헤어진 연인과의 물건과 기억을 보란 듯이 버리고서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들의 논리를 관계의 당위나 예의로 생각하진 않는다.

물건도, 마음속 멜랑꼴리아도…….


나는 나 지나온 시간이 소중해서, 나를 많이 사랑해서, 어디 주름져 그늘진 곳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중이다. 마음속 계속 그늘져 있는 곳엔 곰팡이가 피기 쉽다. 가끔 햇살도 쪼여주고 바람도 통하게 해주어야 꿉꿉한 냄새도 안배인다.


이 모든 게 과거의 나든, 현재의 나든, 앞으로의 나든, 나를 온통 소중히 다루는 중일 뿐, 새로운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몰입하지 않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현재의 사람을 과거 어느 때의 사람과 비교하려고 하거나, 과거의 사람을 현재에서 발견하고 싶어서도 아닐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건 나만의 과거를 체화(embodiment)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나의 마음을 돌보는 기술이기도 하고, ‘나’라는 영혼에 대한 믿음 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말이 쉽지 어떻게 그래?”

" 나와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도 타격받고 무너져버리면 그건 어쩌라구?"

“과거의 사람을 못 잊은 걸 고상하게 정당화하는 거 아냐?”

“상대가 비교당하는 것 같아하면 그땐 맞출 거야?”


나는 아마도 대답 대신 이리 질문 할 것이다. 그리고 숙제도 내줄 것이다.


“당신 안에 은신하고 있는 멜랑꼴리아의 정체를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정답이 없기도 하고 당신이 채점자이니 편하게 맞춰 보셔요. 그리고 모호하게 뭉뚱그린 것 말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시길요”


살다 보면 우울하기도, 침울해지기도, 스스로가 너무 딱해 서럽고 서글퍼져 깊숙한 곳으로 무겁게 침잠할 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나 일이 터졌다 하면 재난 급으로 일상을 침범해 버리는 재난의 일상화 시대, 내 일이건, 내 일이 아니건, 누구나 다 멜랑꼴리아 한 움큼은 있을 거란 얘기다.

자기 안의 멜랑꼴리아(melancolía) 서식지(microhabitat)에 귀를 기울여 보면, 이토록 익숙한 소리가 어떻게 이리도 멀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내 안의 멜랑꼴리아를 만나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해도 제대로 가르쳐 주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마치 천문학자가 우주만큼 광활한 곳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소멸해 가는 중인 소행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내 심연의 영역이 끝(border line)이 발견되지 않은 우주의 부피(volume)만큼이라 해도 모두가 천문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내 안의 우주를 탐험할 보물 지도는 내가 아는 곳에 놓여 있고, 내 우주는 그 누구의 간섭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며, 어떤 권력자라 해도 빼앗거나 처분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의 것이므로. 심지어 서두르지 않아도 그대로 있을 그런 것, 곳이므로.


어쩌면 자신의 멜랑꼴리아에 무관심한 사람은 결국 주변을 걱정시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괜찮다. 자신의 멜랑꼴리아를 수치스럽게 여겨 부정하거나 과하게 숨기는 사람은 타인에게 악인(惡人)일 가능성이 넘친다. 이보다는 나으니까.


이들은 작은 것을 꼬투리 잡아 원리와 원칙을 운운하며 충분히 신경질적이나 스스로 완벽주의자라 착각하거나, 사사건건 예민하게 굴면서 섬세해서 그렇다 하거나, 자신 없는 일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할 생각은 못 하면서 안전함을 추구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그런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자신에게는 무한정 관대할 것이고, 무작정 합리화할 것이고, 무조건 정당화부터 하고 볼 것이다. 그럴수록 타인에게는 엄격하게 반대로 굴 것이다. 한 마디로 나쁜 사람, 사악한 사람, 영악한 사람, 의뭉한 사람이다. 이들이 권력과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면 무서운 사람이 되고 만다.


이 경우, 타인의 도전이나 새로운 생각,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것 마냥, 몸놀림이 자유로운 사람이나, 매사가 유쾌한 듯 즐거워 보이는 사람에 대해 마음 씀씀이가 야박해진다. 타인을 예리한 도덕과 규범과 규율의 칼날로 판단(judge)하면서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 진실로 타인의 삶의 태도나 지향(orientation)을 마음으로 응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스스로 행복해지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손쉬운 무기는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도록 사용된다. 이들은 자신의 멜랑꼴리아를 저글링(juggling)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불쾌할 것이다.


나는 이제야 대답한다.


내 안의 멜랑꼴리아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인정해 주면 된다고. 그럼 마법처럼 슬픔이, 우울이, 고통이, 분노가 모두 나만의 특별한 자원(merit resource)이 되고 나를 세상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이건 일타 강사도 못 가르쳐 주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어서 그러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애도의 대상이 무엇이든 애도할 자격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 마음껏 충분히 과하지 않게 들여다보라고도 할 것이다. 이도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전등 스위치 버튼처럼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멜랑꼴리아 스위치도 어딘가 배선(配線) 해 두라 팁(tip)도 얹어 둘 것이다. 선(善)한 사람들의 멜랑꼴리아는 존중받고 보살핌을 받아 마땅하니까.


이건 마치 가끔 취하고 싶은 날이 있어도 다음 날의 상황에 적당한 취기를 추구하는 것처럼 멜랑꼴리아에 흠뻑 취해있다가도 일상으로의 전환(swich) 버튼을 눌러야 할 때를 마침내 잊지 않기 위해서다. 스위치를 제때 누르지 못해 그대들의 멜랑꼴리아가 다른 이들에게 전가되는 건 당신이 원하지 않을 최후의 것, 의도치 않은 결과로라도 그대를 염려하는 이들을 되려 자발적 감정 노동자가 되게 할 수도, 그들의 소중한 하루의 시간 도둑이 될 수도, 무엇보다 민폐가 될 수도 있을까 봐 힘겹게 참았고 괜찮은 척 해왔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안의 멜랑꼴리아를 들키지 않고 싶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털어놓을 한 명, 내려놓을 한 곳은 있어야 한다. 한 명과 한 곳이 없음을 불운하다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두 몫을 거뜬히 할 수 있으니. 이건 아마도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가 가장 큰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저글링에 실패할 때가 꽤 있다. 어떤 이가 뒤돌아서며 나와는 악연(惡緣)이었다 한 것을 곱씹고 또 곱씹고 생목이 올라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식도가 타들어 가게 내버려 두기도 했었고, 나에게 능력이 없다고 윽박지른 상사의 얼굴을 떠올려 놓고도 씩씩거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해야 할 일들을 턱밑까지 차오르도록 팽개쳐두고 몇 날을 귓구멍이 없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었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갑자기 찾아온 “그냥”이라는 녀석에게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어 신경전달이 멈춘 고무가 된 두 다리로 한동안 아무 곳도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나의 ‘그것’들은 감정이건, 물건이건, 사람이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고, 눈에서 사라진다고 말끔히 없어져 버릴 것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쌓인 먼지 닦아가며 오래될수록 가치와 의미가 깊어지는 고고학자의 애장품처럼 소중히 관리, 보존돼야 하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천문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내 안의 우주를 면밀히 탐색하는 천문학자처럼, 새로운 나보다 오래되어 친근하고 익숙해 흠은 조금이나 애정은 넘칠 수밖에 없는 나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고고학자처럼, “나를 연구”하는 것은 마침내 “나”를 위한 작업일 뿐 결단코 원래의 ‘그것’과는 무관할 것이다. 때문에, 지지리 궁상이라 자신을 비난할 필요도, 질척거리는 인생이라 타박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 멜랑꼴리아가 점유(squat)한 공간은 크기와 경중(輕重)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무작정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익사 직전의 상태라도 손 닿을 거리에 내 몸 하나 거뜬히 건져 올릴 구명조끼가 있을 테니까 겁먹을 필요도 없다.


나는 멜랑꼴리아를 칭송한다. 나와 타인의 멜랑꼴리아 둘 다를 부러워한다. 그대들도 자신의 멜랑꼴리아를 칭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말로 추앙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와 실토하지만 오만하게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인생에도 멜랑꼴리아가 좀 생겼으면 하고 소망했었다. 모든 게 순탄하고 거침없고 쉽게 해결되어 매사에 여유 있고, 유쾌하고, 자존감 상할 일 따윈 없을 것으로 보이는 게 싫었고, 사랑이건 돈이건 부족함이 없이 자라 그럴 것으로 평가받는 건 내 능력치가 절하되는 것 같아 서운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일부러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처럼, 희멀겋고 작은 체구에 말 못 할 죽을병을 입혀 지상에서 십 센티 떠 있는 것처럼 공허하게 부유(浮游)하는 인생을 연기하기도 했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실소가 난다.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누가 봐도 어색하고 거짓 티가 나서 시쳇말로 ‘발 연기’를 해대는 안타까운 연기자였을 게 뻔하니까.


내 나이 오십…. 이젠 나이 들고 병약해져 모든 제 몸을 키우는 것들은 버거워졌다. 그날 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 총량이 정해진 것 마냥, 고갈되고 방전되면 별것도 아닌 것에 소심해지고, 서운함을 느끼고, 속상하고, 참지 않게 되고, 오래오래 곱씹곤 한다. 그래서인지 부쩍 멜랑꼴리아의 방문(drop by)도 잦아졌다. 나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신이라는 작은 용기를 내어 ‘엄마의 잔소리’를 흉내 내 본다.


“살만 좀 빼면 보기 좋을 텐데…”

“아픈데 없는 게 어디야~”


“술 좀 줄여라!”

“빈속에는 먹지 말라 해야지.”


“너는 왜 전화도 없니? 연락 좀 자주 해라!”

“힘드냐, 괜찮냐, 잘 지내냐, 뭐 필요한 거 없냐 물어주면 좀 좋아?”


지겹고 뻔하지만 지나고 보면 저만의 서툰 표현방식일 뿐 애정이 가득했던 염려의 마음이었음을, 이기적인 나였음을 고해하듯 알게 되는 그런 잔소리.


‘엄마의 잔소리’는 여러모로 참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흉내라도 내고 싶다. “힘내”란 말이 버거운 당신일지라도…….


다이어트 얘기를 좀 할까 한다. 살을 뺀다는 의미에 압도당한 다이어트가 아니라 식단관리요법으로의 다이어트긴 하지만. 어쨌든 멜랑꼴리아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 몸집을 부풀리기도 하고, 성공했다 싶다가도 관성(慣性)과 변수 많은 유혹으로 인해 다시 요요(yoyo)가 오기도 하는 것이 마치 성분, 형체, 질량이 있어 다이어트가 필요한 무언가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어서다. 이를 멜랑꼴리아 다이어트라 하자.


몸이 무작정 굶기처럼 식욕을 외면 만 했을 때,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대사량은 줄이고 식욕은 증가시키는 것처럼, 마음이 무작정 괜찮을 거라 방치만 하면, 멜랑꼴리아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나를 무기력하게 하고 우울감은 증폭시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까지 알아채지 못하게, 결국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버거운 볼륨(volume)이 되고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경우처럼 ‘무작정 굶기’는 ‘좋은 방법’도 ‘관리’도 아니란 말이다.

요요는 이럴 때 온다. 물건 요요는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몸과 마음의 요요는 원치 않는, 감당하기 어려운 버거운 무게로 앙갚음한다.


요요가 온 멜랑꼴리아는 마치 휴지기 중인 활화산 같다. 무언지 모를 작은 변수에도 거대한 분출을 만들고도 남을 심연의 태동을 시작할 것이나 분출 규모와 시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의 들끓는 화산. 대비한다 해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일상회복을 도모하는 것만이 유일한 최선인 자연의 역습처럼 감당해야 할 몫을 남기는 경우도 다반사일지 모른다. 그래도 어떤 생애 단계의 화산이건 화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사는 삶은 때로 낭만적이고 많은 경우 존경스럽기도 두렵기도 한 듯 경외(敬畏)롭다.


화산을 품고 있는 멜랑꼴리아 요요는 세상 고상하고 매사 경우 있게 행하던 이를 붕괴로 인한 폭발(melt down)이 일어난 것처럼 “야! 이 멍청아!”, “꺼져!” 같은 살면서 내뱉어 보지도 않았던 말들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당황스럽다가도 이내 몰아치는 자괴감으로 더 깊은 멜랑꼴리아의 마그마에 빠지게도 한다. 요요가 와버린 후의 몸에 대한 마음은 상상이 가능하다. 적어도 원인을 가늠할 수 있고, 힘들면 포기해도 괜찮고, 마음을 고쳐먹어도(mind control) 되고, 다른 방법을 찾아 시도하거나 적어도 극복,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멜랑꼴리아 요요는 상상도, 가늠도, 극복도, 치유도 다이어트보다는 백 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소소하건 크건, 목표와 기대치가 있는 다양한 다이어트 시도만큼 만이라도 신경을 쓴다면 작심삼일이건, 내일부터 1일 이건, 중도 포기하건, 효과가 없건, 부진하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심한 것보다는 백만 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멜랑꼴리아, 멜랑꼴리아… 잔소리의 미학(美學)은 지겹게 해도 부족하고, 뉘앙스를 살짝 바꾼 무한 반복에 있지만 이제 정말 이만하면 되었다.


멜랑꼴리아……. 내 안에 동거중인 사랑스러운 존재……. 내가 힘들고 외롭고 지쳐도 언제나 동행일 영원한 내편…….


나는 이제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곳을 찾아 짧은 기도를 해본다.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 한 편에 종교(宗敎)의 자리는 할당되어 있어 신(神)을 믿는 자이건 아니건 어떤 순간, 무엇일지는 모르나 두 손 모은 간절함을 보여도 된다. 모두가 인력으로 안 되는 소망과 간절함에 언젠가는 신(神)의 응답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방종한 신자의 간절함에도 신(神)은 따스한 어루만짐을 행하실 것을 알기에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 나부터 토닥여주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끝자락, 악(惡)은 행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무수히 많은 날 중, 오늘만큼 작은 두 손을 모아본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그대의 만사가 형통하기를, 그대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늘 그대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요한 3서 1:2)

Beloved, I pray that all may go well with you and that you may be in health : I knew that it is well with your soul. (3 John 1:2)


나는 항상 바란다. 나와 악연(惡緣)이든 인연(因緣)이든 연(緣)이 있었던 모든 이들, 가족의 연(緣)이든, 연인의 연(緣)이든, 벗의 연(緣)이든, 현재 함께 사는 이와의 연(緣)이든, “나”란 집 안과 밖의 모든 연(緣)이 생긴 사람들이 행(幸)하고 복(福)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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