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된 심리 스릴러
*사이코 : 과거에 만난 남자들 험담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는 매력적인 여자. 살다가 그녀를 만나면 얼른 차단하길 권한다.
모두가 헤어질 때 팀장이 카페 건물 벽 가까이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가 환하게 웃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없이 찾아 오고.”
막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먹구름처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외부인에게 가정사를 털어 놓는 일이 과연 옳은 걸까요. 시간이 오래 지나 이분이 무슨 말을 해도 변치 않을 이야기라면 모를까, 말하는 즉시 툭 건드려져 바람처럼 흔들릴 예민한 가정사를 털어 놓는다는 건 이기적인 일이 아닐까요.
이분의 조언을 곧바로 따를 만큼 현명할 자신도 없고, 조언을 그대로 믿을 만큼 이분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만나지 않은 세월 때문에 무척 어색했으니까요. 주변의 흐름에 따라 살면 된다는 아버지의 무기력한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팀장의 기백이 두려움을 가시게 하여 입을 열게 했습니다.
“팀장 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팀장이 손목 시계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작은 행동이 팀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팀장은 지갑을 열고, 안에 든 현금을 모두 꺼내 제 손에 쥐어 줬습니다.
초록색 하나 없이 전부 주황색이었습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 주 모임 때 봬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맛있는 거 먹고 힘내고요.”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지하철 역으로 내려와 금액을 확인했습니다. 무려 40만 원이었습니다. 제 생일도 아니었고, 호텔 청소부나 택시기사처럼 팁을 받는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과거로부터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팀장과 저 사이에는 시간과 나이를 초월한 감정이 있을 법했지만, 그 감정의 장르를 알아 맞힐 단서를 저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ATM기로 갔습니다.
400,000.
예금 알림을 휴대폰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치 팀장이 ‘돈만 있으면 뭐든 된다.’라고 조언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제가 제 발로 회사를 떠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회사 일이 속상해서 엄마 품으로 달려가 퇴사하게 해달라고 울며빌 사람이 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런 지질한 행동은 일자리 귀한 줄 모를 신입 사원 때나 할 일이죠. 적어도 저는 돈줄을 꽉잡아야 한다는 걸,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 만큼은 현명했습니다.
그러니 반격할 시간이었습니다.
연락처를 ㄱ부터 ㅎ까지 쭉 내렸습니다. 저는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직원들 연락처를 모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연락처를 내 주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언니는 저와 입사를 함께 했을 때 신입 사원들을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외향적인 성격의 표본이었습니다. 혼자 밥 먹는 걸 못 견디고, 직원들을 모아 커피를 마시며, 매주 달력에 결혼식과 장례식을 기입하는 그 언니는 우리 회사 비공식 기자였습니다. 그녀가 입을 열면 회사 공기가 흔들렸습니다. 새 소식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뒤처질까 두려운 마음이 사방에서 느껴졌거든요.
[진영 언니. 저 구매팀 나무인데요. 잠깐 상담할 수 있을까요?]
[나무 씨! 그래요. 워크넷 봤어요. 대체 무슨 일이예요?]
진영 언니를 거점으로 몇 다리를 걸치니 워크넷 운영자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그 친구는 진영 언니보다 더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작은 키와 큰 얼굴, 두꺼운 팔목과 허벅지, 회사에서 관찰된 식습관으로는 원인을알 수 없는 이 친구는 굉장히 지적였습니다. 재학 중이던 중간에 편입을 해서 한국 명문대를 두 번 다녔거든요. 문과와 이과 모두에서 재능을 인정 받은 걸로 모자라 국내 리그오브레전드(LOL) 게임 상위 2% 사내 롤 동호회 부장이었습니다.
“뭐야. 너야?”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건강을 잃은 체형에 가끔씩 스치는 자존감 낮은 얼굴은 그녀가 성취한 것들을 거짓말처럼 들리게 했습니다. 만약 LOL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는 그녀가 그런 사람인 걸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정체를 들킨 오즈의 마법사가 발을 빼려고 했습니다.
“워크넷은 롤 하는 친구들끼리 놀려고 만든 사이트였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요즘엔 뭐만 하면 운영자 책임이라고 하더라. 너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아니야.”
“뭐가 아니야? 개념 없는 사람들이 사이트에 오는 게 왜 내 탓이야?”
워크넷은 이년 만에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생 사이트였습니다. 사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식통이었지만, 운영자의 흔들리는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터져버릴 거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운영에 관한 얘기 나누려고 바쁜데 시간 아껴 여기 온 거 아니야. 워크넷에 올라온 내 저격 글 좀 내려 달라고 여기 온 거야.”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저격 글이라는 건 네 주장이잖아. 그 게시글 어디에 저격 글이라고 적혀 있어? 나보고 게시글을 삭제하라고? 그 게시글 이미 조회수가 3000을 넘어갔어. 회사 사람들 절반 이상이 글을 본 거야. 내가 그걸 삭제하면 회사 사람들 절반이 알게 되겠지. 내기할까? 그 사람들 중 컴플레인 걸 사람 분명 나온다? ‘글 왜 지움?’하면서 꼬투리 잡고 늘어질 사람도 나올 거고.”
‘뭔 개똥 같은 소리야?’라는 말이 가슴에서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꾹 눌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