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바람 Mar 23. 2024

100% 영어 수업, K 초등학생들은 잘 해냅니다.

애들만 믿고 수업하면 되겠다.

 수업을 전부 영어로 진행한다고 말하면, 대다수 한국인들은 명문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조차 벌벌 떤다. 하지만 영어 유치원을 졸업한 초등학생들은 달랐다. 열 살 정도 되는 그 아이들은 내가 교실에 들어가면 골대를 노리는 축구 선수처럼 질문을 영어로 퍼부었다. 그 아이들에게는 영어 울렁증이 없었고 외국인에게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지금 다니는 학원에 입사할 때 나는 엘리트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100% 영어 수업을 하도록 주문받았다. 내가 영어를 사용해도 아이들이 이해 못 할 것이기 때문에 사용해 봤자 아닌가 하는 생각을 솔직히 했었다. 

 그런데 웬걸?

 낯선 영어 표현을 귀로 들었을 때 아이들의 얼굴은 곤혹스러움으로 구겨졌다. 나는 물러 서지 않았다. 똑같은 문장을 좀 더 천천히 반복한다. 두 번. 아이들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말할 때는 더 친절하게 반복해 준다. 아이들은 더 집중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이해를 못 하면 문장에서 중요한 명사만 따로 빼서 칠판에 적어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Circle on the word, Presentation on page 18.’
( 18쪽 단어 Presentation 위에 동그라미 칩니다.)


 칠판에 ‘Circle’를 적고 동그라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몇몇 아이들이 펜을 들고 굳어 있으면 곁에 있던 아이들이 답답해서 소리질렀다. “동그라미 치래!”라고. 그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이 되어 친구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오늘 수업을 내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처음만 낯설어하지 오히려 내가 영어를 포기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낯선 영어 문장을 도전 과제로 받아들였다. 모든 배경지식을 동원해 어떻게든 해석해내려고 했다. 몇몇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A-ha moment(아하 모멘트)’를 느끼며 행복해했다. GPT 에 따르면, 아하 모멘트란 “갑작스러운 깨달음, 통찰, 영감, 인지 그리고 이해를 한 순간”으로 다르게 표현하면, 절로 “아하!”하게 되는 순간을 말한다. “아하!”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들의 목표 중 하나였다. 나도 아이들이 아하!할 때 가르치는 보람을 크게 느낀다.


1. 선생님  혼나야겠네요!


 영어 교육학에서 100% 영어 수업은  CLT 티칭법(의사소통 교수법 Communitive language teaching에 근거하고 있다. 이 글의 독자들 가운데는 비전문가도 있으니, CLT 티칭법을 쉽게 설명하면 수업시간에 강사가 영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아이들을 영어에 노출시키고 강사나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이들이 문법과 발음을 틀려도 웬만하면 교정하지 않는다. 명사로 된 단어만 말해도 그냥 들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영어 유치원 때부터 길러온 말랑말랑한 내면을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 울렁증과 외국인 공포증으로부터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온라인 대학에서 영어 교육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이 CLT 티칭법을 처음 들었다. 선생님들의 선생님들이 프로젝터로 피피티를 띄워 여러 가지 티칭 스킬을 가르쳤다. 처음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싶었다. 받아 쓰고 시험도 쳤지만 정작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겐 영어 문장을 나눠 주며 외우게 했다. 아이들이 기초 초등 문법을 틀리면 말을 끊었다. 정확한 문장을 내 입으로 말했다. 이것은 바로 CLT 티칭법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말라는 행동이었다. 

 만약 그 선생님들이 수업 현장 있는 나를 본다면 어떨까? ‘저기요. 선생님." 하고 손짓을 했을까? "복도로 나와 보시겠어요?’하고 목소리를 깔았을까?

‘제발 입 좀 다무세요. TTT(Teacher Talking teaching – 선생이 말 많이 하는 티칭법) 좀 그만하시라고요!’라고 말했을까? 권위적인 교사들에게 지친 학부모와 학생들이라면, 이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보고 싶어 할지 모른다. 다들 한 번쯤 ‘누가 제발 우리 선생님 좀 혼내 줘요.’ 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질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 대학에서 배운 것을 초등 교실에 적용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우리 학원 H 부장 님과 면접을 보던 날로 돌아간다. 우리 학원은 서울 대표적인 핫플레이스 홍대 인근에 위치했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땐 이곳이 롯데월드 같은 실내 테마파크 같았다. 건물의 2층부터 4층까지가 학원이었고 지하에는 식당과 매점이 있었다. 2층의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놀이공원 매표소처럼 보였다. 그곳에선 세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상냥한 얼굴로 안내를 하다가 곧바로 낯빛을 바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곤 했다. 그리고 정중앙에 기둥처럼 위치한 방이 상담실이었다. 학부모를 상담하기도 하는 그 방에서 나는 강사 면접을 경험했다. 나는 그곳에 앉아 놀이공원 기념품처럼 전시된 영어 교재들을 둘러 보았다. H 부장 님이 웃으며 들어왔다. 지금도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다 보면 이곳이 천국인가 싶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영어 선생님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H 부장 님은 그중에서도 대천사 가브리엘이었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선한 얼굴로 선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학원을 왜 옮기려는 거예요?” 

 내가 이직하는 강사였기 때문에 이 질문이 내 양심을 건드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직하려는 의도가 선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었다. “이전 학원에는 학원 일 대부분을 원장 님이 책임지셔서 제 일이 별로 없었어요. 일이 없는 만큼 배울 기회도 별로 없었죠. 강사로서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로 말을 마쳤다.

 “지금도 영어 교육을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데,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교실에서 적용하고 싶어요.” 나는 H 부장 님이 내 말에 공감해 줄 줄 알았다. 강사들은 대학원까지 등록하며 공부를 하는데, 그렇게 공부하는 이유는 교육현장에서 더 잘 가르치기 위함이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대학도 학생을 받을 때 그런 명분을 내 걸지 않았던가. 그런데 H 부장 님은 이 대목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우리 학원에서 과연 선생님이 원하는 수업을 하실 수 있을진…” 대천사 가브리엘은 이상주의자를 만난 현실주의자가 되어 특유의 차분함으로 내 기를 꺾었다. 그녀는 “그렇다면 3월부터 일할 강사 일곱 분 중 한 분으로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어린이 손에 쥐어 주는 달콤한 사탕처럼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이 원하는 만큼 공부한 지식을 교실 수업에 적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랜 경력의 관리자가 현장에서 느낀 통찰은 과연 옳았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는 바로 다음 주에 100% 영어 수업 원칙을 깨뜨려야 했다. 아이들은 300명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통계를 낸 교재 속 그래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영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프 읽는 방법을 한국어로 설명하지 않으면, 수업 시간 40분 내내 그래프만 붙잡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소수의 아이들은 5분 안에 이해를 했다. 나머지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가 한 명씩 가르쳐야 했다.


3. 마무리하며.

 여전히 100% 영어 수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가 해야할 도전이다. 어떤 날은 너무도 쉽게 목표를 달성하지만, 어떤 날은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불가능했다. 내가 만든 교재가 아니었고 내가 만든 진도표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배경지식도 제각각이었다. 쉬운 날과 어려운 날의 편차가 워낙 크다 보니 수업 준비 과정 자체가 게임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일을 게임처럼 할 수 있는 직업이란 것에 참 감사한 일이었다. 완료한 수업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릴 때마다 게임의 퀘스트를 완료한 것처럼 쾌감을 느꼈다.

 아직은 조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 겨우 2024년의 1분기이고 내가 입사한 첫 달조차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이 일 년이니 아직 열한 달이나 남았다. 많이 하면서 는다는 점에서 수업은 글쓰기와 닮았다. 나는 이 아이들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내일이 기대가 되고, 한 달 뒤가 기대가 되고, 일 년 뒤가 기대된다.




작가의 이전글 영어 유치원 출신은 아니지만 너희를 가르치러 왔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