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두 겹의 벽, 낙제의 그림자
토플·토익 만점에 가까웠지만,
미국에 오자마자 그는 어린아이로 돌아갔다.
학기 시작 전 신입생 리트리트에서 그 사실이 곧 드러났다.
커다란 통나무 강당 안,
낯선 얼굴들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그는 반 박자 늦게 따라 웃었다.
웃음의 이유가 들리지 않았다.
옆자리 학생이 등을 두드리며
“You got it, right?”라고 귀엣말을 했지만,
그 말마저 두 겹으로 울렸다.
그 순간 알았다.
그의 영어는 시험용 언어였다는 걸.
대화에서는 시험 점수가 통역해주지 않았다.
“콩글리쉬”를 넘어 “잉글리쉬”로 가는 길,
그 벽은 높았고, 한없이 미끄러웠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대화의 흐름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도
말들은 이미 다음 주제로 달려가 있었다.
커피 마실 틈도 없이
그 자리에 돌처럼 앉아
웃음 뒤로 버티는 척만 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문을 여는 순간, 낯선 언어의 파도가 밀려왔다.
교수의 빠른 설명이 쏟아지고,
각 나라 특유의 억양과 뉘앙스가 뒤섞인 질문이 이어졌다.
단어는 들렸지만, 의미는 스며들지 않았다.
케이스 첫 페이지를 펼쳤지만
문장마다 모래가 낀 것처럼 읽히지 않았다.
어떤 케이스 문제는 읽고 또 읽어도
질문의 의미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팀 미팅은 더 가혹했다.
라운지 테이블에 노트북 다섯 대가 펼쳐지고
“pivot”, “trade-off”, “walk me through” 같은 말들이
백색소음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각국을 대표하는 명문대 출신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무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경제의 벽도, 언어의 벽도 그들에겐 없었다.
막힘없는 영어가
빠른 사고와 날카로운 토론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모두가 진지하게 토론을 이어갈 때,
그는 쓰디쓴 눈웃음만 지었다.
투명인간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장벽은 하나가 아니었다.
첫 번째 벽은 농담과 은유, 뉘앙스로 살아 있는 일상 회화였다.
두 번째 벽은 공대생에게 낯선 회계와 마케팅, 그리고 전략의 언어였다.
두 벽이 뒤섞여 두터워지자 귀는 막히고,
그는 오직 눈으로만 버텨야 했다.
교재에 형광펜을 긋고, 사전을 뒤적였다.
밤마다 문장을 쓰고, 다시 지웠다.
그래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첫 쿼터 중간시험에 나섰다.
결과는 참담했다.
첫 번째 시험.
서술형 풀이를 연습장에 적다가
시간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부랴부랴 답안지로 옮기는 중간에 종소리가 울렸다.
“Time!”
감독관의 외침과 함께 답안지가 걷혔다.
순간, 교실이 적막해지고,
손끝이 얼어붙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연습장을 함께 제출해도 좋다는 안내가 있었다는 걸.
시험 시작 전 교수의 짧은 설명을,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뒤늦게 교수를 찾아 연습장을 내밀었지만,
점수는 최저로 처리됐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건 죄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돌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두 번째 시험.
문제는 일곱 개. 그중 다섯 개를 골라
채점을 원하는 번호에 동그라미로 표시해야 했다.
그는 그 지시를 놓쳤다.
결과적으로 앞에서부터 다섯 개—
자신 없는 문제들까지 포함해—가 채점되었고,
정작 제대로 풀어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문제는
채점에서 빠졌다.
성적표를 받아 들자 손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이 멀어졌다.
첫 쿼터를 마치고 공개된 성적,
세 과목이 과락 직전 경고였다.
학교 규정상, 네 과목 이상 그런 점수를 받으면 재적이었다.
눈앞이 아찔했고, 세상은 흑백으로 바래졌다.
‘어떻게 영어 한마디를 놓친 대가가,
학위 자체를 흔들고 나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친한 동기가 농담처럼 툭 내뱉은 한마디,
“Circle the five—don’t forget next time.”
그 말은 비수처럼 마음을 헤집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은 없었다.
전력으로 매달리는 수밖에.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나머지 공부를 자처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수업 끝나고 교수를 찾아갔다.
복도에서 바쁜 교수를 붙잡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설명을 부탁했다.
시험 전에는 먼저 찾아가
지시 사항을 미리 확인했다.
당일에는 동기와 조교에게
재차 묻고 또 물었다.
간절함은 마침내 길이 되었다.
두 번째 쿼터에서 추가 과락 경고는 다행히 면했다.
그때의 성적표는 여전히 초라했지만,
이름 옆에는 ‘재적’이라는 글자가 없었다.
그는 첫 학기를 살아남았다.
그러나 분명해졌다.
막연한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언어와 지식, 두 겹의 벽을 뚫을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새벽 창밖,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 가루 같은 눈발이
소리 없이 흩날렸다.
그는 책을 덮고
한동안 창문을 바라보았다.
낯선 이국의 밤,
들리지 않는 영어가
가슴속에 막막한 응어리로 맺혀갔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숨소리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