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하루키의 팬들 대다수가 그러하듯 나도 10대 때 접한 하루키 월드에 한때는 푹 빠져있다가, 반복되는 템플릿과 레파토리에 살짝 질려 몇 년간 그의 에세이나 단편 소설 말고는 손을 대지 않은 참이었다.
문득 그가 정교하게 빚어둔 비현실적인 세계관에 몸을 푹 담그고 싶어졌다. 때마침 작년에 신간이 출간되었고, 나는 적절한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오랜만에 부담감을 내려놓고 이야기 그 자체에 젖어드는 시간을 보냈다. (근 몇 년간은 책에서 뭔가를 얻어내고 책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빠져 있었기에 단순한 유희로써의 독서가 더욱 간절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고 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졌다. 늘 봐왔던 비슷비슷한 하루키의 페르소나들이 생전 본 적 없는 세상 속에서 눈에 익은 행태로 신비롭고 신선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역시 하루키가 좋다, 고 다시 한번 느꼈다.
너무 유행을 탔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 문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약간은 천대받는 작품의 대열에 끼었다고 느낀다.
지적인 이미지의 한 인플루언서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사귀지 않는다'는 게시물을 올렸고 그 게시물에 많은 이들이 동감했다는 글을 공유했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리뷰나 알라딘 서평 등에서도 그의 작품은 '자기 복제'의 연속이라 더는 흥미롭지 않다는 의견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금전적인 걱정 없이 우아하고 착실한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 항상 등장하는 재즈와 클래식, 신선한 재료로 간단히 만들어낸 파스타와 와인, 무인양품이 떠오르는 정갈한 착장들, 어딘가 고장 난 듯 방황하는 소녀와 평범한 듯 꽤 비범한 '선택받은' 한 남자... 나도 한때는 그가 작품 속에 그려내는 여성상에 적잖은 반감을 가졌었다. 신비롭고 병약한, 무언갈 영원히 잃어버린 (그리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유리 조각같은 그녀들을 보는 게 괴로웠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아주 오랜만이라 그런지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존재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그 전까지의 하루키 히스토리는 뒤로한 채 현재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장을 덮으며 느낀 감정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람한 직후 마음속에 피어오른 감정과 아주 흡사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서도 명료했다. 불쾌한 듯 상쾌했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키와 하야오 모두 철학가에 가까운 탐구자다. 사실 모든 창작자는 탐구자가 맞다. 그러나 이 두 예술가는 좀 더 비슷한 궤도를 그리고 있다. 자신만의 견고한 벽 안에서 끊임없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한다. 그런 고민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어떻게 굴절 없이 올바르게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두 작품에는 이러한 고민의 과정과 결과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실제로 두 작품에 그런 '내면의 방'이 아주 구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두 예술가 모두 70대 80대에 들어선 지금(꽤나 이른 나이에 작품의 정점을 찍고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 대중의 관심사를 쫓기보단 스스로를 반추해 내는 작품을 내놓는 것은 흐름상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고집스럽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이게 나다”라고 표현해내는 그 스터번함이 매우 멋지다. 결국 시대를 풍미하는 한 분야의 대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의 잡음에는 되도록 귀를 닫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만 집중하여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이행한다. 그것이 인생의 단 하나의 숙제이자 미션이며,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할 줄 아는 것이 결국 그들의 재능인 것이라 실감한다.
창작이라는 영역에는 언제가 한계점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해 가며 자신감 있게 치고 나가는 명쾌함과 시원시원함, 그 특유의 패기 넘치는 에너지는 전성기 이후로는 다시금 돌아오기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이나 업계의 분위기는 더더욱 확실하게 무시한 채 자신의 탐구에만 몰두하는 이 두 예술가의 모습이 다소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어쨌든 그들의 작품은 대중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까). 더듬거리며 자기만의 방에서 스스로 거듭 질문을 던지고, 결국은 원래의 답으로 돌고 돌아오는 모습이 다소 답답하고 어리석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결국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며 처음으로 이 거장들에게 아주 약간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기 복제로 비춰질 수 있는 그들의 뻔뻔한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그들을 좀 더 간절하게 응원하고 싶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삶을 마무리 짓는 준비를 슬슬 시작하는 시점의 인간은 다 비슷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인간에게도)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불안,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린 세계에 대한 회의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고민의 과정을 작품으로 솔직하게 바깥으로 꺼내놓는 것(그것이 자신이 이미 이뤄놓은 업적에 결코 플러스가 되진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론적으론 완전하지 않은, 어쩌면 모두가 이미 품고 있던 해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믿음과 사랑 같은).... 또한 요즘 같은 시대에 주변의 시선이나 의견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진리를 위해서 자본과 시간을 있는 힘껏 투자하는 것. 이 모든 게 진심으로 존경스러우며 그 깊고 탄탄한 도시의 일부를 공유받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끝의 끝까지 가보는 자기 탐구는, 결국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이자 로망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