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을 결심한 계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모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모가 죽으면 이모의 이야기들도 죽게 될까? 오직 이모의 입을 통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귀로, 뇌로 사르르 흘러들어온다. 얌전히 머무르나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 이모의 강렬한 음성이 한 편의 극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극을 멋대로 붙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사라지기에는 한 사람이 살아낸 세월이 너무 찬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엔딩은 우리의 삶에도 존재하고, 이를 막을 도리는 없다. 목소리의 형태, 극의 형태, 책의 형태를 빌려 할 수 있는 최대한 이 빛을 오래 유지하는 것밖에. 천천히 꾸준하게 또 줄기차게 타오를 수 있도록 …
1월 1일, 새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엄마, 이모, 나 셋이서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이모집은 도쿄에 있었기에, 해외에서 맞이하는 드문 신정이다. 유난히 달이 둥글다. 우리만을 비춰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밝게 빛난다. 이모와 엄마는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여유 있지만 막힘없는 속도로 털어낸다. 언어에도 경력이 있나 보다. 이모는 30년 넘게 도쿄에서 살고 있는지라 사실상 자주 뵙지는 못한다. 만나는 것도 몇 년에 한 번 꼴이다. 그래서인지 볼 때마다 더 애틋한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이모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가는 게 보인다. 사촌언니는 자신의 눈에 이모의 모습은 50대에서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의 얼굴은 그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야속한 시간은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고 언질을 준다." 그 말을 듣고 왜인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10년 후에 울 엄마도 지금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이려나. 생각에서 달고 씁쓸한 맛이 난다.
이모는 오래전부터 심장병을 앓아오셨다. 지금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다. 그럴 때마다 사촌언니는 이모가 정말로 자신을 떠나가려는 것일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모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 기로에서의 감각을 선명히 느꼈고, 이를 엄마와 나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해 주었다. 오직 이모의 숨결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고유하고도 진귀한 이야기들이었다. 배고파도 표현하지 못하고 묵묵히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10대 시절, 사업 실패와 성공의 희로애락, 어느새 이곳저곳 점철되어 버린 타국의 문화와 언어들이 불러일으킨 정체성의 고뇌가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심장에 달린 기계는 이모가 생을 다해도 썩지 않고 남아있을 테지만 이모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그 후의 일들을 상상하기가 꺼려졌다. 몹시 두려웠다. 두려움은 나를 파고들며 해결책을 갈구했다. 마땅한 묘안은 없었다. 대신 유사한 대책을 떠올렸다.
모든 건 재가 되고, 영원한 건 없다지만 그럼에도 기억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창작을 시도한다.
삶에 있어서 잊히면 안 되는 것들을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잡아두는 것이다. 타인의 빛이 그의 몸 밖으로 뚫고 나오기를 희망할 때 그 빛을 주어 담아 자신의 마음과 조심스레 포개어보는 것. 그 사람의 빛을 양분 삼아 새로운 흙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재창조되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 창작을 이룰 때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기억하고 다시 보게 된다. 나의 창작활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년간 창작의 다양한 작업들 중 하나인 디자인을 공부했다. 디자인을 처음 시작할 때 맨땅에 헤딩하듯 디자인 툴에 익숙해지려 했다. 툴을 기똥차게 잘 다루면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 툴을 신처럼 다루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좋은 디자인인지 명확히 판가름할 수 없고, 뚝딱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는 건지 머리를 끙끙 앓으며 연구해보기도 했다.
이 파편들의 끝에는 취업이라는 달성목표가 있었지만 그보다 값진 과정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다. 돌이켜 보니 마음에 남는 건 몸부림치며 얻어낸 이력서 한 줄보다 그 과정을 경험하며 느끼게 된 통찰들이었다. 통찰은 감정과 섞여 조각이 되었다. 조각은 시간의 흐름을 삼키며 단단해졌다.
작은 파편들이 모여 천천히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독자분들께 작지만 힘 있는 이야기로 다가가고 싶다. 이 책에서는 창작하는 삶을 결심한 디자인과 고등학생이 디자이너로 취업하기까지의 일상과 고민의 흔적을 무겁지 않게 떠들어보려고 한다.
삶의 지도를 디자인할 때 도움이 되는 영감의 조각을 수집하는 장으로 활용하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