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P"과 함께 살아가기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냉철한 비즈니스맨인 자자 코다가 오랜 기간 동안 보지 않던 딸 리즐과 함께 30년간 공들인 페니키안 사업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단조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영화는 결과보다는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중심에는 자자 코다의 사업 계획이 들어있는 구두 상자 중 하나이기도 한 THE GAP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 초반 딸 리즐에게 자자가 여러 구두상자를 늘어놓으며 다양한 사업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만 THE GAP 상자에 대해서는 “어차피 알게 될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말한다. 그것이 앞으로 영화에서 설명할 중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gap은 사업 경쟁자들이 자자를 방해하기 위해 원자재 가격을 올려 페니키안 사업에서 추가로 발생한 손실이다. 영화는 바로 이 차이를 메꾸기 위해 동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떠난 여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봤을 때 이 gap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GAP
웨스 엔더슨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섬과 같이 존재한다. 서로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완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간극이 존재한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정해진 대사를 읊는 웨스 엔더슨 스타일의 연기 방식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 어떤 거리감을 형성하게 되면서 이러한 독립성을 더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신론자와 독실한 수녀, 자본주의 사업가와 공산주의자 테러단체, 부유층과 빈곤층 등등. 이때, 그의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물들 각각은 자신의 세계를 타인에게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각기 다른 섬들이 하나로 뭉쳐질 수는 없지만 다리로 서로를 연결하듯 각기 존재하며 느슨하게 연결될 뿐이다. 페니키안 사업의 주된 내용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연결하는 산악기차와 운하 사업,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레스토랑과 호텔 사업인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인물들은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끊을 수 없는 절절한 혈연이나 뜨겁게 타오르는 로맨스가 아닌 인간 사이의 보편적인 인류애나 선의에 기대어 서로 느슨한 형태의 연대를 맺으며 함께 나아간다. 마치 감독의 예전 작품인 <moonrise kingdom>의 비유처럼 독립된 서로 다른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큰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개인 간의 연대가 이뤄지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연대가 이뤄지는 순간들을 잘 살펴보면 진실된 마음이 드러날 때와 연결된다. 원래 자자 코다의 사업 방식을 보면 Gap을 메꾸기 위해 동업자들을 설득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협박하고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약서에 항목들을 교묘하게 숨겨놓고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만적인 방식들은 전혀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업을 완수하고 싶은 마음을 진실되게 내비쳤을 때나 무방비하게 테러리스트들 앞에 나섰을 때, 딸에게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털어놓을 때, 그리고 비욘이 자신이 리즐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할 때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따라서 우리는 각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진실된 마음을 기반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영화 내내 알 수 있다.
여러 자아들 사이의 GAP
이 gap은 개인의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여러 자아들 사이의 차이 (gap)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개인은 다양한 모습의 ‘나’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모습에 따라 ‘나’는 수녀가 될 수도 부유한 재벌가의 딸이 될 수도 있고, 냉혈한 비즈니스 맨이자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곤충에 미친 교수이자 산업 스파이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여러 ‘나’들 사이에서 인물들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짜 ‘나’라는 개념은 사실 허상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이 ‘나’이자 ‘나’는 항상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나’는 딸 리즐의 소품이 변하면서 상징적으로 시각화된다. 수녀였던 리즐이 아버지 자자와 함께 지내면서 가지고 다니는 묵주, 칼, 담배 파이프가 점차 더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가 개인의 내면서에서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택했기 때문에 수녀의 자리를 포기하고 칼과 담배 파이프를 선물로 받게 된다. 이렇듯 나는 나를 이루는 원래 기질과 주변의 환경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항상 불안이 따른다. 안정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자 코다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자자 코다는 여권을 소지함으로써 어떤 나라의 국민으로서 정의되는 것을 거부한다. 겉으로는 금전적인 이윤 때문이지만 실상은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권을 가지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함으로써 자자 코다는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안주하지 않고 그에 따른 불안을 껴안으면서 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렇듯 이상적인 모습의 내가 되고자 억지로 노력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진짜 ‘나’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모든 모습의 ‘나’와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총체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인간과 신, 선과 악 사이의 GAP
이 영화의 전체적인 자자 코다의 구원 서사와 연결해 봤을 때 이 영화에서 gap은 인간과 신의 뜻 사이의 gap 또는 선악 사이의 gap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자 코다는 냉정한 비즈니스 맨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사업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폭력과 거짓말을 일삼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해 이득을 얻었다. 사업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한 명의 인간으로 봤을 때, 그는 외롭게 혼자 존재했다.
영화 초반의 욕조 씬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자자 코다와 어떤 교류도 없이 그저 정교하게 짜인 동선에 따라 기능적이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모습은 너무도 공허해 보인다. 이 모습은 그가 주변 인물들과 어떻게 관계하며 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그는 진심을 나누는 관계를 돈으로 대신해 오는 삶을 살았다. 죽음의 위기에서 보게 된 세명의 아내가 그려진 환상에서 자자 코다가 세명의 아내에게 바치는 공물은 돈으로 가득 찬 사슴이었다. 그동안 자자 코다는 관심과 사랑을 돈으로 대신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변하게 된 계기는 반복된 죽음과 수녀인 딸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온다. 이 모험기의 이름인 ‘페니키안 스킴’에서 페니키안은 성경에서 가나안 지역의 중요한 해양 국가 중 하나로 주로 이방신의 우상을 섬기는 이방 사람들로 간주된다. 이 여정이 자자 개인의 죄악과 연결되어 비유되는 악한 이방신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되찾기 위한, 출애굽 한(악에서 벗어난) 자자의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성경적 악인이라는 대사로 두 차례나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삼촌 누바는 따라서 싸워 이겨야 하는 자이자 자자의 내면의 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삼촌 누바는 무기를 파는데서 오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평화를 거부하는 존재다. 또한 자자 코다와 누가 이길지 궁금해서 싸우는 무의미한 폭력에 일으키는 자이다. 삼촌 누바와의 결투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은 실제로 성경에서 죄악과 우상이 만연한 애굽(이집트) 스타일로 치장된 호텔인 것도 그가 싸워 이겨내야 할 악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자는 어떻게 자신의 악과 싸워 이기고 변할 수 있었을까? 이는 죽음의 환상 속에서 리즐의 고백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리즐은 기도하는 방법을 물어보는 자자에게 신이 자신에게 그 어떤 응답도 주지 않았다 말한다. 대신 신이 어떤 생각을 할지에 맞춰서 행동하면 대체로 맞는다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신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의 뜻과 인간의 뜻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에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리즐의 말처럼 인간은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매 순간 현실에 뛰어들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리즐에게 응답하듯, 자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누바와 싸워 이기고, 모든 재산을 쏟아 페니키아 지역에 노예 제도와 기근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온다. 이때 페니키안 스킴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사업이 아닌 그 자자의 속죄이자 페니키안 지역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자의 사명으로 변모하며 그동안 자신을 지켜준 재산이 아닌 딸과 가족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택하는 자자가 변하는 삶의 여정이 된다.
GAP 사이를 연결하는 연대와 사랑
영화에서는 이렇듯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나 다양한 자아의 모습,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의 처럼 다양한 종류의 GAP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 <페니키안 스킴>은 이러한 GAP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각자의 차이와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사랑하라고 제안한다. 간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고정된 기준에서 벗어나야 하고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과 혼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마저 껴안고 용기를 낸다면 인물 각자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완벽한 이해나 완전한 일치가 아니라, 내 안의 여러 모습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위에 느슨하지만 진실된 연대를 쌓아가는 것—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인간성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결국 <페니키안 스킴>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 메울 수 없는 간극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웨스 앤더슨의 특유의 유머와 미장센, 그리고 인물들의 독특한 거리 두기를 통해 ‘gap’이라는 불안과 혼란의 공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틈 안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사랑,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을 잔잔하게 응원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