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희망의 동화일뿐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우리는 흔히 계급 간 갈등과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폭력, 그리고 그걸 받아내는 소외된 하층 계급의 인물들을 만난다. <설국열차>의 혁명을 꿈꾸는 아이와 <기생충>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지하실에 숨어 사는 남자, <옥자>의 맛있는 식품이 되기 위해 길러진 돼지 옥자 모두가 그러하다. <미키 17>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전 작품들과 결을 같이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미키는 반복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마저 자본과 시스템의 효율을 위해 재활용된다. 이러한 설정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성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철저히 도구화하고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정적으로 결말 부분에서 이전 작들과 다르다. 봉준호의 기존 작품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몸부림은 거대한 시스템에서 좌절되거나 겨우 불씨와 같은 희망을 지켜내는 것에 그친다. 전작인 <기생충>과 <설국열차>에서는 결코 상승하지 못하는 하층 계급의 무기력함을 그리며 끝이 나고, <옥자>에서는 ‘미자’가 돼지 ‘옥자’를 구해내면서 보다 희망적인 결말을 그리지만 여전히 수많은 슈퍼 돼지들을 구해 내지는 못한다. 이런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미키 개인이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되찾는 모습을 그린 <미키 17>의 결말은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무엇이 이처럼 따뜻하고 동화 같은 결말을 가능하게 했을까?
미키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수용적이고 수동적이다. ‘미키’가 이렇듯 낮은 자존감과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미키’가 과거에 가지게 된 트라우마와 사회적으로 반복 학습되어 버린 무기력함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키 17>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은 인간의 생계와 직결되지만 오직 이윤과 효율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점차 자신이 수행하는 노동의 의미와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이는 인간의 가치를 오직 도구로서의 ‘쓸모’로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영화 초반, 크리퍼가 ‘미키 17’을 살려주었을 때 미키는 자신을 왜 살려주었느냐고, 나는 불량고기가 아니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를 통해 당시 ‘미키’가 자신의 존재가 오직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깊은 무력감과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로 쓰이면서 여러 무시를 당할 때 그가 스스로를 얼마나 무가치하게 여겼을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기로조차 쓰이지 않았음에 분노한다. 이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존중받기 원하는 마음이 깊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내내 죽음과 프린팅 되는 것을 반복하는 ‘미키’가 ‘미키’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나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미키’를 사랑해 준 거의 유일한 인물은 ‘나샤’이다. ‘나샤’만이 ‘미키’를 쓸모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 자체로 대한다. ‘나샤’는 매번 죽음을 맞이하는 ‘미키’의 곁을 지키며 진심으로 위로하려고 한다. 또 몇 번째 미키이던 상관없이 ‘나샤’는 미키를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었다. ‘나샤’가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하고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에서 철저히 소외되면서 ‘미키’는 끝끝내 파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봉준호의 인터뷰처럼 ‘미키’와 ‘나샤’의 사랑이야기는 이 영화의 기둥이자 척추이다.
이러한 ‘나샤’의 사랑을 버팀목 삼아 ‘미키’는 또 다른 자신 ‘미키 18’을 만나며 한 단계 성장한다. 미키는 과거 가족을 잃은 자동차 사고가 자신이 누른 버튼 때문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그래서 미키는 버튼을 누르는 행위, 즉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시스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미키 18’이 ‘미키 17’을 위로하는 장면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와 수용의 순간이자 미키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준다. ‘미키 18‘은 ’ 미키 17’에게 위로를 줌으로써 과거에서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 미키 18‘이 '마샬'과 함께 죽기 직전, '마샬'이 ’ 미키 18‘에게 묻는다. 죽는 것이 두렵냐고. 그렇다면 그게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숨 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인간으로서 살아 있을 수 있다. ‘미키 18’은 자신이 사랑하는 ‘미키 17‘과 ‘나타’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관계를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마음은 죽음도 이기게 한다고. 이들의 사랑을 힘입어 ‘미키’는 마샬이 다시 살아나는 악몽 속에서도, 프린터(복제 기계)를 폭파시킬 때에도 ‘버튼’을 눌러 선택하고, 그 결과를 담담히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마샬의 아내가 마샬을 재프린팅시키는 악몽 속에서 우리는 미키가 아직 가지고 있는 잠재된 불안과 계속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하지만 ‘미키 17’이 fuck off라 말하며 꿈에서 깨는 것처럼 앞으로 또 다른 마샬이 등장한다 해도 ‘미키 17‘은 더 이상 굴복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음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키는 더 이상 미키 17도 18도 아닌 인간성을 회복한 미키 반즈로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개인의 성장에만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종에게까지 그 영역이 확장된다. 이 영화에서 외계 행성에는 토착 생명체 ‘크리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여러 모로 인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명의 계속된 죽음을 이용하여 안전한 삶을 누리는 인간과 달리 한 명의 베이비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서 전 종족이 뛰쳐나온다. 서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나샤와 미키들의 시선은 이제 서로 뿐 아니라 다른 종인 크리퍼에게로 옮겨 간다. 그래서 이질적인 외모와 ‘적’으로서의 크리퍼들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그들과 소통하고 동등하게 소중한 생명인 베이비 크리퍼를 구출해 내며, 크리퍼들과의 공생의 방법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모색해 나간다.
미키는 혁명에 성공했고, 민주적 절차와 합의 끝에 프린터(복제기)는 폭파된다. 베이비 크리퍼는 구출되고 인간과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는 평화 아래 서로 공생하는 방법을 찾았다. 봉준호의 기존 영화들과 비교하면 유달리 희망적이고 행복한 결말이다. 이전의 영화들과 무엇이 달랐기에 영화에서 이런 결말이 가능했던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소통’에서 찾았다.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인물들 간 소통의 여부는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생충>에서 상층과 하층 사이 가장 불공평한 것은 소통이다. 기택의 가족은 반지하의 방에서 휴대폰을 높이 들어야 겨우 와이파이 신호를 잡을 수 있었다. <기생충>에서 소통은 항상 상층 계급에서 하층 계급으로 명령의 형태로 하달되고 아래서 위로 흐르지 못한다. 언덕 위 부잣집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 근세와 나중에 그곳에 갇히게 되는 기택의 모스부호는 동익의 가족이나 외부 세계에 전달되지 않는다. 하급 계급의 가족들도 서로 소통했더라면 공생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서로 그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나마 돼지’ 옥자’의 구출에 성공하는 <옥자>의 경우에도 옥자와 미자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고립된 오지에서 살고 있었고, ‘미자’와 ‘옥자’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나마 ‘미자’와 ‘옥자’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ALF 대원들조차 미자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다. <미키 17>의 권력자 마샬의 경우에도 크리퍼와의 갈등 상황에서 통역기를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미화시키는 데 사용하고자 할 뿐, 소통의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되고 가스로 전 크리퍼를 몰살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 미키‘들과 ’ 나샤‘의 경우에는 달랐다. 통역기를 만들어 마마 크리퍼와 미키가 서로 소통하는 장면이나 베이비 크리퍼를 구출하는 순간에 ‘나샤’와 ’ 미키’만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나샤‘와 ’ 미키’의 비밀 암호가 그들의 육체적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역시 사랑과 소통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시킨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소통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시작점이자 방법이 되어 영화가 보다 밝고 따뜻한 결말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렇듯 본 영화는 사랑과 그에 바탕을 둔 미키의 개인적 성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분명 다루고 있는 것들도 많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봉준호의 전작들에 비해 다소 밋밋하고 평평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평면적이고 밋밋하다는 말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단순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방향성이나 깊이가 부족하다는 BBC의 평가처럼 하나의 방향성으로 정리하기 어려울 만큼 굉장히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봉준호의 가장 최신작이면서도 전작들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영화임에도 왜 이런 감상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까?
우선 캐릭터들이 단선적이고 영화에서 각각 상징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능적으로 이용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나샤’와 ’ 미키’의 사랑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저 사랑이 미키의 성장과 문제 해결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용되었을 뿐 그 사랑이 어느 정도로 진실한지 관객에게 충분히 설득하지 않는다. 우선 ‘미키‘와 ‘나샤’의 사랑이 가볍게만 보이게 연출된 점도 그러하다. 미키가 ‘미키 17’과 ’ 미키 18’로 멀티플로 존재하게 된 것이 미키가 삭제될 위험이 있는 중요한 일임에도 처음 ‘미키‘들과 ’ 나샤’가 조우하는 장면에서 ’ 나샤’가 옥시조플이라는 마약에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 나샤‘가 쉽게 ’ 미키’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미키를 있는 그 자체로 좋아해서 몇 번째 미키이든지 상관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약에 취해서 무엇이든 상관없었던 건지 혼란스럽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이 ‘나샤‘와 ’ 미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도망간다. 여기서 ’ 나샤‘는 어떤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키의 애인이자 동료로서 이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나중에 ’ 나샤’가 실험실 안에서 죽어가는 ‘미키‘의 옆에 끝까지 있어주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쌓아왔어야 했던 어떤 서사적 맥락 없이 단순히 그들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장면이 쓰였다는 느낌이 남는다. 미키의 사랑이 ’ 카이라’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들의 사랑이 약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물론 ‘카이라‘는 ’ 나샤‘와 달리 동정심과 애인이 죽지 않고 영원히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도구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미키의 계속해서 복제된다는 특징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샤‘의 사랑과 구분되지만 거의 육체적 관계로 이어질 뻔할 정도로 흔들리는 미키의 모습에서 ‘나샤‘와의 사랑의 굳건함이 또 한 번 흔들리게 된다.
그다음으로 영화는 상당히 많은 주제와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 대해 어떤 견해나 답을 내놓지 않고 종종 풍자의 소재로 가볍게 이용하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중심 서사가 분산된다. 이는 이 영화의 본진이 현실 기반의 서사나 인물 심리의 깊이보다 풍자와 우화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키 17>은 계급 착취, 노동 소모, 식민주의, 독재적인 정치 체제, 기술 발전의 부작용 등 방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각각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우화의 방식으로 빠르게 주제를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결말까지 가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가끔 지나치게 생략적이거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핵심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통역기와 같은 뜬금없는 장치 등에 의존해 조급하게 마무리되거나, 독재 정권 하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민주적 절차에 의해 합의하는 결말을 맞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러한 서사적 도약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게 한다. 또 영화의 전개 방식이 너무 흩어져 있어 중심 줄거리에 집중하기 어렵다. 영화 초반에는 복제인간의 존재론을 화두로 던진 뒤 내내 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에 집중하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미키의 개인적 성장으로 돌아온다. 이렇듯 이야기의 중심이 자주 이동하고 줄거리가 산만해지며, 전체적으로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이 생기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구조적 무력감과 좌절, 그리고 소외된 하층 계급의 비극을 넘어, 사랑과 연대, 그리고 소통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주체성의 획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소모의 고리를 끊고, 나샤와의 사랑, 미키 18과의 연대, 그리고 크리퍼와의 소통을 통해 자신이 단순한 복제 인간이 아닌 독립적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별성, 타자와의 공존,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통의 힘을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방대한 주제와 상징, 그리고 우화적 장치들을 한꺼번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서사의 응집력과 인물 심리의 설득력에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핵심 갈등의 해결이 때로는 우화적 장치나 편의적 전개에 의존하고, 중심 서사가 분산되며, 일부 인물의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지 않아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키 17>은 봉준호 영화 세계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절망 대신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