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클라베 >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언 3장 5절)

by 단귤


"확신은 통합의 큰 적이자,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영화 초반, 콘클라베 시작 전 로렌스 추기경이 드리는 기도의 일부인 이 말은, 확신에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틀이 현실을 왜곡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이런 확신을 경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나‘라는 존재 역시도 거대한 사회의 원칙과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 틀 자체를 인지하는 것도 어렵고, 분명한 가치관과 방향성 없이는 휘몰아치는 현실에 휘둘려 길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삶의 매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혹시 나는 내가 만든 자기 확신의 틀에 갇혀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콘클라베>는 이러한 질문을 콘클라베라는 특수한 상황 설정을 풀어낸다. 콘클라베는 가톨릭 종교에서 이전 교황의 죽음 이후 전 세계 추기경들이 교황청에 모여 투표를 통해 새로운 교황을 결정하는 시기다. 영화는 이 투표를 관장하는 인물인 토마스 로렌스를 중심으로, 외부와 차단된 투표장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사회의 중대한 결정의 과정을 겪는 추기경들의 다양한 인물상, 그리고 그들 관계의 대립 사이에서 관객에게 불확실성과 확신의 언어를 경험하게 한다.

시각적으로 빚어낸 단절과 소통

영화는 공간과 빛의 대비를 통해 사회의 규칙과 원칙이라는 틀을 넘어 삶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함을 시각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콘클라베는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밀폐된 시스티나 성당에서 진행된다. 외부의 소리, 빛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마저 차단된 것 같은 이 공간은 여러 불확실한 요소들을 완벽히 차단하기 위해 인간의 철저한 계획하에 마련된 인위적이 공간이다. 매우 화려한 색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이는 오히려 공간의 차갑고 정적인 모습을 더 강조할 뿐이다. 이 공간 안에서 추기경들은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나뉘어 권력 다툼에만 집중하고, 교회라는 틀의 존속을 위해 부정직함조차 합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외부 테러로 성당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상황이 전환된다. 세상의 난장으로 인해 뚫린 이 구멍을 통해 투표장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밝은 빛과 새소리가 투표장 안을 가득 채우고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투표장은 이제 숨 쉬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투표용지마저 바람에 맞춰 숨을 쉬는 것 같은 연출은 이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 결과, 추기경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대립을 넘어 진정 사랑과 관용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빈센트 베니테즈를 교황으로 선출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의 대비는 토마스 로렌스의 방에서도 볼 수 있다. 콘클라베 책임자라는 무거운 중압감과 부담감에 가득 찼던 로렌스의 방은 콘클라베가 끝난 후 창을 가로막던 가림막이 열리면서 처음으로 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세상과 연결되면서 창밖으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환한 빛과 그 안에서 웃는 세명의 수녀들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는 또 다양한 상징적 소품들을 사용하여 단절과 소통을 그리고 있다. 영화 초반과 후반 가장 눈에 띄게 변화하는 소품 중 하나로 우산을 꼽을 수 있다. 우산은 자연 현상인 비와 사람 사이에 존재하며 비를 막아서는 도구다. 영화 초반에는 추기경들이 모두 검은색 우산을 쓰고 나타났다가 베니테즈의 연설 이후, 흰색 우산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우산은 세상이라는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작은 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처음에는 권력 다툼이라는 어두운 색의 우산을 쓰고 있다가 베니테즈의 연설 이후 사랑과 증오 사이의 선택이라는 새로운 틀을 가지게 되어 밝은 흰색의 우산으로 바꿔 쓰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흰색의 우산을 쓰고 위에서 아래로 행진하는 추기경들을 그린 씬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한 명의 추기경만이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갔다는 것이다. 다른 추기경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에 변화는 생겼지만 불확실성에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각자의 틀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어쩌면 이미 자신의 불완전함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 베니테즈 만이 우산 없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틀 안과 틀 밖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

공간의 대비뿐 아니라, 영화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메시지를 구체화시킨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 대응한다.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자신만의 확신과 욕망에 사로잡혀, 현실을 자신들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고프레도 테데스코는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다름을 배제하고, 조지프 트랑블레는 개인적 야망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주변 환경을 조작하며, 알도 벨리니는 자신만이 답이라는 자기 확신에 갇히고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틀에 시선이 멈춰 있으며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인 토마스 로렌스의 경우 자신이 가진 기준의 틀을 점검하고 부수고 나아가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토마스 로렌스의 끊임없이 고뇌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계속 반복해서 보여준다. 영화 초반 콘클라베 시작 전, 의심하는 교황을 구하는 그의 기도문이나, 사람들의 예상과 그에 대한 대비가 무색하게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요한 23세를 이어 요한 24세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그가 인간의 규칙과 틀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신의 섭리를 희망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가 고민했던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다. 그는 선택의 순간에서 진실을 보기 위해 그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깨야하는지 고민해야만 했다. 교회의 오래된 전통과 가부장적인 체제와 자신만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은 진실을 밝히고 베니테즈를 교황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깨부수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교황이 된 빈센트 베니테즈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간이 만든 규칙과 관습을 넘어설 뿐 아니라 삶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사랑과 관용의 자세를 지켜낸다. 그는 인터섹슈얼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가부장적 전통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이 된 후 '인노첸티우스'(무결한, 순전한)로 불리기 원했던 것도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에서 오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축복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영화 <콘클라베>는 자기 확신과, 불확실성 그리고 관용이라는 주제를 시각적 , 서사적 장치로 치밀하고 일관되게 풀어내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영화는 공간의 밀폐성과 개방성, 어둠과 빛을 통해 단절과 소통을 상직적으로 시각화시키고 추기경들의 대립과 변화를 통해 각자의 신념과 확신이 어떻게 현실을 해석하고 제한하는지, 그리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로렌스의 기도문처럼 스스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죄를 짓고 실수하더라도 용서를 구하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인간상을 이상적인 답안으로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개인의 심리적, 사회적 틀을 깨고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과 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며, 이와 관련해 깊은 성찰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감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넘어, 영화적 언어와 연출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주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