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태의 폭력
우리는 보통 폭력을 명백한 악의의 결과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만약 폭력이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순응의 결과라면 어떨까?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질문하지 않음으로써, ‘어쩔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폭력이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 영화는 이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박찬욱 감독의 이번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생존의 논리가 어떻게 한 인간을 가해자로 전락시키는지, 그리고 그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은폐되고 정당화되는지를 비유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정당한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이러한 명분들은 폭력의 잔인성을 은폐하며 폭력의 구조를 지탱하고 유지시킨다. 이 글에서는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폭력이 일어나고 반복되며 구조에 대한 순응이 어떻게 폭력을 생산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철저히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는 기만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폭력은 계급, 생존, 합리성의 언어로 위장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산층이라는 지위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중산층으로서 누리는 안정적인 소득, 주거, 적절한 여가생활은 곧 개인의 가치로 환원되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사회적 낙오자로 분류된다. 만수의 몸부림 역시 표면적으로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처럼 보지만 그 이면에는 중산층이라는 지위를 상실하지 않으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 만수는 지키고자 했던 가족으로부터 소외된다. 영화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딸의 연주곡은 만수가 선택한 폭력을 통해 지켜졌지만, 결국 만수는 그 곡을 듣지 못하는 유일한 인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내 미리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진실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이 사랑하던 만수를 영원히 잃고 아들은 트라우마를 떠안게 되었다. 만수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선출의 삶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주입시킨 모습의 성공을 따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예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이 나의 가치가 되면서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공장에 들어선 만수가 귀마개를 끼는 모습처럼, 무엇이 진실인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위장은 노동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영화 초반 만수가 구조조정을 막으려 했던 이유는 단순히 생계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함께 종이를 만든다는 직업적 자부심,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감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중산층의 지위와 경제적 소득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직업은 단순한 생존 수단으로 퇴색되고 만수는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된다. 만수는 이제 텅 빈 공장에서 혼자 남아 그저 기계를 관리하는 부차적인 존재이자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편의와 효율이라는 이유 아래 폭력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살처리 된 돼지들도,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도, 자동화를 이유로 구조 조정된 수많은 노동자들도 모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설명된다. 편의와 필요에 의한 것임으로 누구도 폭력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새로 심어진 나무만을 베어내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라고 포장해도 수많은 나무가 잘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살인 도구로 쓰인 총을 목전에 두고도 만수의 살인사건이 조용히 덮이는 이유 역시 형사들이 더 쉽고 편리한 설명을 찾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는 폭력을 감춘다. 아버지가 자살한 창고 위에 세워진 만수의 온실, 실직자에게 희망의 얼굴을 하지만 결국 그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레드 페퍼 페이퍼즈처럼 폭력은 긍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폭력은 그 잔인성을 합리성과 필요라는 언어 속에 숨긴 채 일상의 일부가 된다.
만수에게 지키고자 하는 이상적인 낙원인 ‘집’이라는 공간은 사실 여러 세대에 걸쳐 폭력이 반복되어 온 공간이다. 과거 만수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했고, 구제역으로 인해 수많은 돼지를 살처리한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창고에서 자살하게 된다. 만수의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하여 사용했던 북한식 권총은 만수에게 전달되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무기가 되면서 과거 폭력의 잔재가 현재에서 대물림된다. 또 이렇듯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만수가 자신의 양아들에게 거짓 증언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다시 재현된다.
역설적이게도 3대에 걸쳐 답습된 이러한 폭력은 만수가 지키고자 하는 낙원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아버지의 총이 쓰였던 월남전은 국가의 경제적 성장에 이바지하였고, 가정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동일한 총은 살인의 도구로 사용된다. 아들을 처벌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협박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렇듯 만수의 낙원인 집은 3대에 걸친 폭력의 서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그 집 마당에 심긴 낙원의 선악과를 연상시키는 사과나무 밑에는 대량으로 살처리 된 돼지들, 만수가 죽인 피해자들의 시신과 아들이 훔친 핸드폰이 묻혀 있다. 만수가 낙원이라고 부르는 곳은 만수의 딸이 반복적으로 말했듯 그 뿌리부터 썩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편의와 효율,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인식되지 못한 채 당연한 것으로 계승된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면서까지 종이회사에 취직되려고 노력하였어도, 만수는 끝끝내 ‘뽑히는 자’로 남는다. 그가 견제했던 아내의 상사인 오진호가 치과의사인 ‘뽑는 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 속 실업자들은 하나같이 사회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사회가 제시하는 정답이라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세뇌할 뿐이다.
만수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나름대로 상황을 통제하고자 한다. 철사를 덧대 나무의 모양을 변형시키며 분재를 만드는 그의 취미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만수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나무라는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만수는 결코 시신을 토막 낼 수 없는 사람이다. 철사를 이용해 시신을 구부려 처리했듯이 그는 그저 정해진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출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수의 살인은 극단적이지만 그가 시스템의 폭력에 그대로 굴복하며 그 틀에 자신을 철저히 맞춰나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는 살인의 과정에서 직업적 자부심(범모), 다른 선택지(시조) 그리고 자신의 이상(선출)을 제거해 나가며 철저히 채용자가 원하는 자신이 되고자 한다. 만수가 살인할 때 배경이 되는 ‘고추잠자리’나 ‘그래 걷자’는 만수의 살인이 수동적인 태도의 결과라는 것을 더 잘 보여준다.
이렇듯 만수는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썩은 이를 그대로 방치하듯 고통을 그대로 견뎌낸다. 물론 만수도 썩은 이빨을 뽑아내고 싶다. 뽑히는 자가 아닌 뽑는 자가 되고 싶다. 술을 마시고 취하고 나서야 홧김에 이빨을 뽑아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썩은 뿌리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썩은 뿌리를 겉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
영화는 만수의 수동적인 폭력을 통해 폭력이 언제나 적극적인 악의에서만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회 구조적 폭력은 계급, 생존, 그리고 합리성의 언어로 위장된 채 쉽게 인식되지 못하고, 그러한 폭력을 직시하지 못한 개인은 ‘어쩔수가 없다’는 수동적인 태도로 폭력에 순응하게 된다. 그 결과 만수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폭력을 내면화해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의 행위는 저항이 아닌 순종의 결과이며 이러한 순종은 폭력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수단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잘려 나가는 나무들을 조명함으로써 폭력의 주체를 영화 속 인물에서 관객으로 옮겨온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과연 우리는 이 폭력의 바깥에 서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의 작은 일들도 결국 우리의 선택의 결과임을 영화를 통해서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