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저는 지금 베네치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계획보다 1년이 늦어진 작년 9월 베네치아 건축대학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결국 대학원은 그만두기로 결정한 채로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7년 초, 대학을 마치고 호주 멜버른으로 가 3년간 지냈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봤던 제가 좋은 집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고, 집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 보자는 다짐만을 가진채 봇짐장수처럼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동서남북향의 집, 도시의 빌딩 숲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집, 아름다운 공원 바로 앞에 있는 집, 차를 손수 정비할 차고가 있는 집, 본 적 없는 독특한 평면을 가진 집, 사계절 색과 모양이 바뀌는 나무가 창문 앞에 있는 집,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바깥 시선이 완전히 차단된 마당이 있는 집. 그렇게 제 마음속에 제가 살고 싶은 집의 기준을 만들어갔습니다.
호주에서의 삶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적당한 차를 사게 됐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호주의 자연을 느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인적도 없는 드넓은 해변에서 발가벗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온전히 자연이 되었던 기분을 잊지 못합니다. 바다에서 게나 문어, 소라, 전복들을 잡아먹거나, 산 중턱에서 주변을 뛰어다니는 캥거루와 쏟아지는 별들과 함께 밤을 보내며 받은 감동은 제가 살고 싶은 삶의 형태를 조금 더 분명히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건축이 문화의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200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 산다는 것에서 어떤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찬란한 과거가 멈춰있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채 베네치아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 어쩌면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제 멋대로 이 도시에 어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산다면 제 삶도 아름다워질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곳이 다 그렇듯 여러 어려움이 있었고, 학교마저도 제가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모든 일들을 돌아보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처해있던 상황을 스스로 납득시켜야만 했습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걱정들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시간을 갖고 엉켜있는 제 과거의 실오라기를 풀고서 이곳을 떠나겠다는 생각으로 제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국 사회가 제게 응당 요구하는 사회적인 조건들에서 벗어나서 제 삶이 흐르는 저만의 방향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건축가뿐만 아니라 어떤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원의 학위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제 삶의 흐름을 더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이곳에 살아가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나니 세상에서 가장 불편할 수도 있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져 참혹할 정도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문화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지켜나가는 이탈리아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움이 제게 닿는 순간을 감각하고 눈물을 왈칵 쏟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 감각을 활짝 열어젖힐 줄 안다면 오늘 집을 나설 때 제게 쏟아진 지중해의 햇빛이 어제와 얼마나 달랐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랑의 형태를 몇 가지로 분류하여 그곳에 사람들을 끼워 넣는 게 아니라, 사랑의 종류는 정확히 제가 관계 맺는 사람의 수만큼 있다는 깨달음을 준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들어준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저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제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 도시의 거대한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제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이곳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작가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제 여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쩌면 작가님을 따라 정동길을 걷던 날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작가님의 답장을 받은 날부터였을지도 모릅니다. 작가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달빛이 여전히 저를 비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저의 9년간의 여정이 그 달빛의 단 한 번의 반짝임이라도 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주제넘은 용기와 함께 이 편지를 씁니다.
작가님,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추신. 아래 파일은 제가 이곳에 오기 전 아는 분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한 귤밭에 계획했던 집입니다. 여러 여건상 결국 지어지지는 못했지만, 작가님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