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사랑의 형태를 몇 가지 분류로 정의하려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안다. 나도 그렇게 내 감정을 몇 가지 정해진 틀에서 분류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기 전부터 너무 당연하게 사랑하기 시작한 나의 부모도 나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하물며 부모를 향한 사랑도 다른데, 어떻게 한 가지 사랑의 형태를 만들어서 그곳에 많은 사람들을 끼워 넣을 수 있을까. 어릴 적 친구와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우정이나 의리 같은 특정 형태로 정의한 친구들은 나를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일 수도 있다.
내가 가진 사랑의 형태는 정확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있다.
8월 21일
나는 호주에 살면서 많은 해변을 보았다. 인적이 전혀 없고 이름도 없는 끝없이 펼쳐진 해변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기분을 잊지 못한다. 내가 온전히 자연이 된다는 게 얼마나 짜릿하고 자유로운 기분인지 온몸이 바닷물에 닿는 순간 알게 되었다. 거대한 해안선을 가진 호주에서의 해변은 어디로든 운전을 하면 나오게 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 대수롭지 않은 바다가 너무 거대하고 찬란해서 내 앞으로의 모든 경험을 망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호주에서 돌아와서 한국의 기암괴석이 펼쳐진 동해바다를 봤을 때 내가 느낀 무미건조한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L은 전날 밤 나에게 리도의 해변에 가자고 물었다. 이전에 이미 족히 다섯 번은 거절을 했었다. 겨울에 리도의 해변을 가봤고, 그때도 동해바다를 봤을 때와 같은 무미건조함을 느꼈었다. 굳이 해변을 보러 이곳에 오지는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L은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며 평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내가 해변에 같이 가야만 한다고 요구했고, 나도 더는 거절을 하기가 미안해서 알겠다고 했다. L는 환호성을 지르며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못 이기듯 L에게 약속을 했다. A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A와 L은 먼저 해변에 가 있었고, 나는 느지막이 그곳으로 향했다. 바포레토를 내리고 리도 선착장을 나왔다. 선창장을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내가 알던 겨울 리도의 분위기와 전혀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휴양지에서 느낄법한 사람들의 현재를 망각한듯한 자유로운 활기가 가득했고, 베니스에서는 맡던 냄새와는 다른 바다의 짙은 짠내가 났다. 등 떠밀리듯 왔다고 여기고 있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괜히 민망해졌다. 버스를 타고 A와 L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A가 버스정류장 앞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해변이 보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내 얄팍하고 짧은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A와 L 그리고 그들의 친구 두 명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가져온 간단한 음식들을 먹었다. 바다를 들락이며 사진을 찍었다 바다가 풍기는 자유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L에게 민망하게 더 일찍 오지 않은 게 아쉽다고 했다. L은 신이 나서 웃으며 앞으로는 자신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결정들은 종종 이렇게 산산이 부서지곤 한다. 얕고 깊지 못한 결정들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평생의 중심을 굳게 지켜줄 수 있는 뿌리 깊은 다짐도 필요하지만, 가볍게 심긴 다짐이 너무 깊게 뿌리 박히기 전에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
8월 21일 (수정)
호주에 살면서 많은 해변을 보았다. 호주는 거대한 해안선을 가진 섬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길은 결국 바다로 향한다. 결국 막다른 길에 도착하듯. 인적도 이름도 없는 끝없이 펼쳐진 해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파도가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이미 알고있었을지도 모를 진실. 날 덮고있던 모든걸 벗어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온 몸이 바다와 닿는 순간 나도 자연이 되었다.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몇 해 뒤 한국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동해바다에 도착했을때 느꼈던 무미건조한 기분이 생생하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8월 20일 늦은 밤, L은 다시 내게 다음날 리도의 해변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이미 족히 다섯 번은 거절을 했었다. 지난 겨울 혼자 리도의 해변을 가봤고, 그때도 동해바다를 봤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바다를 보러 굳이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L은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며 이전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내게 같이 해변에 갈 것을 요구했다. 더는 거절할 염치가 없어서 그러겠다고 했다. L는 환호성을 지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못 이기듯 손가락을 걸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A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L과 A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느지막이 그곳으로 향했다. 약속은 했지만 여전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늑장을 부렸다. 일부러 수영복도 챙기지 않았다. L은 내게 전화를 해 맥주와 간단히 먹을것들을 좀 사와달라고 했다. 바포레토를 내리고 리도 선착장을 빠져나왔다. 리도는 베니스와는 다른 곳이었고, 내가 알던 겨울의 그곳과도 전혀 다른곳이었다. 오래되지 않은 건물들이 반듯하게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고, 포장된 도로위에 버스와 자동차가 움직이고 있다. 베니스에서 맡던 냄새와는 다른 바다의 짙은 짠내와 현재를 망각하려고 애쓰는 휴양객들의 활기가 뒤섞여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등 떠밀려 이곳에 도착했다고 여기고 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L과 A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A는 버스정류장 앞으로 날 마중 나왔다. A는 건물 사이사이 작은 골목을 지나서 바다로 걸어갔다. 막다른 길로 향해가듯. 길 끝에서 수평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L과 A 그리고 A의 친구 둘이 해변위에 펴둔 돗자리 위에 앉았다. 그들의 살에 바닷물이 촘촘히 맺혀있었고 머리카락은 뻑뻑하게 젖어있었다. 온몸이 모래투성이었다. 신발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가져온 음식과 맥주를 꺼냈고 A는 젖은 모래가 범벅인 손으로 맥주병을 덥썩 집어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다가 풍기는 바람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작은 틈을 찾아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내 다짐이 산산이 부서졌고, 기뻤다.
L이 나를 따라 바다에 달려들어왔다. L에게 더 일찍 오지 않았던 게 아쉽다고 했다. L은 신이 나서 큰 목소리로 앞으로는 자신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것을 요구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에서의 파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파도가 치고 있었다.
8월 25일
나는 매일 가는 도서관 아래 있는 갤러리에 연간 회원으로 등록이 되어있어서 공짜 티켓을 받을 수 있다. 예전에 A가 그 갤러리를 가고 싶다고 했다. 내 티켓을 받아서 A에게 줬다. A는 전시를 다 보고 고맙다며 얇은 노트를 주면서 이곳에는 행복을 적어보라고 했다. 노트의 표지에는 ‘행복은 종착지가 아니라 여정이다. (Happiness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라고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노트를 폈다. 나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기 전에 지금 이 순간 내게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적었다.
이 순간 내게 가장 큰 행복은 내가 정말 누구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in this moment is discovering who I really am.
내가 발견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적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