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역에서 온 A는 우리에게 리구리아식 전통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했다. 바질 나무 한 그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판매하는 바질 나무를 찾았다. 바질을 사서 사진을 보냈다. A는 포장지에 적힌 글을 보고 리구리아에서 재배된 바질이라며 내가 제대로 된 바질을 샀다고 했다. A도 어쩔 수 없는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A가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려고 옆에서 구경을 했다. 엄마와 할머니에게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묻는다. 엄마와 할머니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정해진 방법을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는 것이 큰일인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고 A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는 듯 엄마와 할머니의 의견을 적당히 듣고 자신만의 바질 페스토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승환 교수는 전통을 씨간장에 비유했다.
“계승만 생각하고 보존만 생각하는 그런 전통이라면 박물관의 유물이 되기 쉽다. 전통이 살아있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새로운 수혈을 받아서 창신이 있어야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유서 깊은 가문의 씨간장 같아야 한다. 옛날 간장을 다 먹어서 비우지 않고 조금 남겨서 새로 메주를 만들고 장을 담글 때 다시 이용한다. 새로 만드는 메주에는 다른 새로운 요소도 들어가면서도 본래의 맛도 계속 가져가기 때문에 맛이 더 깊어지고 풍부 해진다. 그게 좋은 전통이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도태되고 박제되고 형이하학 될 뿐이다. 계승한답시고 외부와의 차단을 막고 자기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박물관의 유물처럼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 것을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해서 바깥만 쳐다본다면 우리는 뿌리 없는 세계시민처럼 유랑하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씨간장을 유지시켜가는 것처럼 우리의 전통 속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들을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개량하기도 하고 확대시키기도 하고 수장하기도 하면서 나아가야 된다.”
나는 내 전통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8월 16일~8월 19일
나를 보겠다며 Y가 한국에서 베니스에 왔다. 비행기를 타기 1시간 전 겨우 나와 연락이 된 Y는 베니스를 오는 이유는 오로지 나와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과연 내가 Y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부담이 생겼다. 그리고 도대체 나는 Y와의 4일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 생각해봐야만 했다.
Y는 내가 꽤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내가 불행하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전에도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확신할 수 있게 된 사실이다. 내가 베니스에 있으면서 새롭게 얻는 것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내가 잃는 것들은 Y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나도 굳이 Y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Y의 눈을 통해 본 내 삶의 모습이 알고 싶었다. Y에게 내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테니, 떠나는 날 내 삶에 대한 Y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Y는 4일간 내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Y에게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다짐을 더 했다. Y가 베니스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 강요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본 베니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주면서 Y가 베니스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렇다면 Y는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베니스에서 느낀 감정을 가끔씩 꺼내서 회상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어쩌면 Y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작은 이정표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어쩌면 주제넘은 생각. 내가 그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나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4일간의 여행이 끝나고 Y가 떠났다. Y는 내가 베니스에 더 오래 지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조급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의 공간만 항상 허락한 채로 살아간다면 내 모습이 충분히 아름다워질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