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곰곰이 생각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이름마저 아름다운 '추억의 공원(Parco delle Rimembranze)'. 베니스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태양의 움직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베니스의 바다는 지중해 태양의 강렬한 햇빛을 받아 출렁이는 빛이 된다. 그 안에 어떤 초월적인 힘이 넘실거린다. 해가 넘어가는 모습에 따라 머릿속에 있던 복잡했던 것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어간다. 매일같이 바다와 해가 만나는 도시의 아름다움이 나의 심장을 뛰게도 만들고 평온하게도 만든다. 베를렌의 꿈에 나온 죽은 랭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되찾았어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해와 뒤섞이는
바다
8월 10일
San Lorenzo night. 과거 성 로렌조의 순교를 기념하던 날 쏟아지던 유성우를 보고 정해진 이름이다. 특정 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날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가장 많은 유성을 볼 수 있는 기간이다. A와 혹시나 별똥별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저녁을 먹고 집 앞으로 나갔다. 달이 너무 밝았기 때문에 별똥별을 보지는 못했지만, 건너편 리도에서 오늘을 기념하는 별똥별과 같은 불꽃놀이를 보았다. 멀리서 터지는 불꽃을 보는 것은 가까이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불꽃이 터지고 수 초 후 들리는 폭죽음. 감각이 뒤틀린듯한 기분. 나의 연약한 감각은 이미 이렇게 변형된 채로 세상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 불꽃에 ‘wow’ 라며 줄곧 작은 탄성을 지르는 A의 모습. A는 나보다 세상을 훨씬 더 섬세하고 민감하게 감각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A가 느끼는 세상은 어떨지 궁금했다.
내 감각이 충분히 약하다는 사실은 결코 내가 감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더 강하게 감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정당화한다.
The fact that my senses are weak enough never justifies that I don't have to sense, it only justifies that I have to try to sense harder.
8월 11일
2013년 9월 경,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 제목에 매료돼서 구매해두고 읽지 않고 묵혀둔 책이었다. 단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변화되는 내 모습에 놀랐었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작가님을 내 멋대로 조금 더 친근하게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 감사와 사랑의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는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뒤 답장을 받았다.
저의 책을 둘러싸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달에서 달빛이 퍼져나가듯 세상의 것, 독자의 것이지요. H님에게 제 글이 어떤 작용을 했다면, 그것은 저의 것이기보다는 H님의 어떤 것(본성&본향)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작가가 자신의 신념과 경험으로 쓴 글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만들고, 찾아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까요. 그러한 과정이 작가나 예술가, 독자가 꿈꾸는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도서관에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베니스 비엔날레 아르세날레 전시장으로 갔다. 약 30번째 입장까지는 횟수를 헤아렸지만, 이제 내가 몇 번을 방문했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숱하게 들락거렸다. 전시장이 닫히기 2-30분쯤 전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서 매일 한두 개의 작품을 골라 감상한다. 나를 어딘가에 몰래 숨겨놓을 때면 어릴 적 거실 소파 아래 숨어있을 때 느끼던 것 같은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비엔날레 전시장을 나만의 커다란 놀이터로 만들었다. 종종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푸념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 미술도 달빛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이후부터. 그것을 감상하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나 수수께끼가 아니라, 작가가 내게 건네준 물감과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부터.
9년 만에 작가님께 답장을 쓰기로 결심했다.
8월 13일
R은 도서관 입구에서 안내를 해주는 일을 한다. 언젠가 내게 본인의 이름과 번호가 적힌 종이를 주며, 이탈리아어를 써야 하거나 외롭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하라고 했다. 외국인인 내가 겪을 어떤 어려움을 헤아려주는 세심한 배려. 여느 때와 같이 저녁 7시가 조금 안된 시간 도서관을 나왔다. R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짧게 눈인사만 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짧은 인사가 미안했는지 R에게 저녁을 맛있게 먹으라는 메시지가 왔다. 잠시 길에 멈춰 그의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이름이 눈앞에 보였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어떤 아이의 생일인 듯했다. R을 알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모습. 혹은 R에게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모습. 그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내 주변이 풍성해지면서 생겨난 변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