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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일기] 7월 25일, 26일, 29일

by 베니스 일기

7월 25일

오늘은 도서관이 닫는 날이고, L도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L은 며칠 전 내게 쿠스쿠스라는 음식을 해주었다. 세상에서 작은 파스타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오늘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같이 요리를 하자고 했다. 같이 근처 마트로 갔다. L은 마트를 돌아다니면서 나에게 이것저것을 묻는다.


-대구 크림 치케티 먹어봤지?

-아니.

-정말이야? 그럼 오늘 이것도 무조건 먹어봐야 해.

-스트라차텔라 치즈는 알지?

-아니.

-진짜로? 그럼 이것도 무조건 사야 해. 이거랑 가장 잘 어울리는 가지 토마토 파스타도 해줄게.

-연어 타르트 같은 것도 안 먹어봤어?

-아니.

-연어랑 타르트 재료도 사야겠다. 간단하게 쿠스쿠스 재료를 사려고 왔는데 일이 너무 커졌네. 그치만 어쩔 수 없어.


L은 거창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치케티를 먹으며 와인을 마시는 치케티 매니아가 되었다.



7월 26일

피아노를 치는 S를 처음 만난 것은 2달 전 내가 이사할 집을 찾을 때였다. 본인의 집을 너무 사랑하는 집주인 G는 면접을 보듯 여러 명을 만나며 자신의 집을 가장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G는 그날 S와 나를 같이 불러 놓고 면접 아닌 면접을 보기 위해 집 앞 광장에서 만나 집으로 향했다. 해가 이미 져버린 시간, 집으로 들어서면서 본 집의 분위기, 거실의 천창으로 들어오는 푸른빛 하늘과 그 색으로 물든 거실, 그리고 그 위에 떠있는 달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S는 천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던 내 옆에 드뷔시의 달빛을 틀었다. 송곳처럼 아주 뾰족한 형태의 아름다움이 내 가슴을 찌르고 후벼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며칠 전 S에게 전날 밤 집 계약을 위해 집주인 G를 만나고 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혹시나 G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고,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놓고 왜 계속 G에게 그렇게 집착하냐고 핀잔을 하듯 내게 물었다. 나는 사실 G에게 집착하는 게 아니라, G의 집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오늘 S에게 이삿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도움을 청하는 S의 말투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당했다. 너무 얼떨떨해 차마 거절을 할 생각도 못했다. 언제가 편하냐고 물었고, 오늘 밤 G의 집에 짐만 두러 갈 것이고 G는 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게 G의 집을 다시 방문할 날을 만들어 주려는 S의 모습. 다시 간 G의 집에서 조금 더 명확해진 아름다움. 그리고 리알토 다리 아래에서 같이 마신 스프리츠.



7월 29일

오랜만에 밤바람이 무척 시원했다. 바깥바람을 쐬며 와인이 마시고 싶어 졌다. A가 와인병을 들고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A와 밖으로 나가 앉을 만한 곳을 찾으며 걷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 하다못해 꽤 쌀쌀했다. A는 여름이 가버리는 것이 슬픈 일이라고 했고, 나는 겨울이 오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했다. A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뛰어서 집으로 가다가, 비가 더는 맞을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려서 높은 건물 옆에 숨었다. 쫄딱 젖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나는 겨울만큼 비 오는 날도 좋다고 했다. A는 세상에서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저 착각이라고 했다.


나는 비나 눈이 오는 날을 더 좋아한다. 나와 남들 사이에 공기보다 더 밀도가 높은 어떤 매개가 놓인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버스는 무조건 맨 뒤 구석 자리에 앉는다. 아무도 나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나는 모두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 도서관에서도 내 뒤에 꽂힌 책을 고르는 게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구석의 벽을 등진 자리에 앉는다. 골목의 끝이 물과 만나는 베니스의 막다른 길에 앉아있는 걸 좋아한다. 나는 나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일까? 나는 은밀하거나 의뭉스러운 사람일까? 혹은 음침하거나 음흉한 사람일까? 나는 변태적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 마음이 끌리는 것과 그 이유를 잘 안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취향은 없는 것이 아니라 찾으려고 하지 않아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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