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비워지는 언어 채워지는 대화(아들의 편지)

아들의 편지

by stone


엄마,


전기포트가 끓기 시작하자 뚜껑이 얇은 숨을 내쉬듯 살짝 떨렸고, 엄마는 그 소리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첫 마디를 꺼냈죠.

‘어머나’

경보음이 아니라 초대장처럼 들렸습니다. 물이 끓는다는 사실보다, “세상이 아직 새롭다”는 엄마의 반응이 먼저 도착했거든요.


언제부턴가 이제 우리 집 대화는 세 마디로 운용되기 시작했어요.

• 어머나: 세계가 열릴 때.

• 우야꼬: 길을 결정해야 할 때

• 아이고야꾸나: 방법이 막막할 때.

('아이고야꾸나’는 “아이고 나는 어쩔꺼나”가 줄어진 말이라, 숨결에 난처함이 살짝 섞여 있어요. 어느 날부터 엄마가 평소 말 대신 ‘아이고야꾸나’(급하면 ‘아이꾸나’)로 답하시기 시작했는데, 저는 한동안 뜻을 짐작만 했죠. 그러다 엄마 입에서 또렷하게 “아이고 나는 어쩌나”가 흘러나오는 걸 듣고서야, 그 말의 자리와 마음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세 마디만으로도 하루가 꽤 잘 굴러갑니다. 낯설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도요. 이를테면 안방 거울 앞에서 엄마가 자신의 반영에게 손을 흔들며 ‘우야꼬’라고 낮게 말하실 때—그건 ‘누구냐’가 아니라 ‘어쩌지’에 가깝습니다. 상대가 낯선데, 모르는 사이처럼 굴기엔 예의가 걸리고, 아는 사이처럼 굴기엔 기억이 모자라서 한 표현이 아닐까 짐작했어요. 그때 저는 한 발짝 옆으로 서서 거울의 ‘손님’과 간단히 동선을 나눕니다. “여기로 비켜드릴게요.” 그러면 엄마는 ‘아이고야꾸나’로 숨을 털고, 사태는 종결. 서로 다치지 않고 지나가곤 했죠.


뇌과학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뇌는 창고가 아니라 예측 공장, 들어오는 신호를 바탕으로 ‘먼저 짐작하고 틀리면 고치는’ 곳이라고. 병이 깊어지면 이 ‘고치기’가 더뎌지거나 엉뚱해집니다. 그 사이에 낯섦이 자랍니다. 그래서 저는 정답을 들이밀기보다 울타리를 먼저 세웁니다. 엄마의 짐작이 위험으로 굴러가지 않게, 경계만 부드럽게 표시해 두는 겁니다.

• ‘우야꼬’가 나오면 선택을 하나로 줄이고(“지금은 수저부터요.”),

• ‘아이고야꾸나’가 나오면 공동대책을 제안합니다(“그럼 같이 해요. 저는 물, 엄마는 그릇 담당.”).

• ‘어머나’가 나오면 함께 감탄해 줍니다(“오, 오늘 물 소리 좋다.”).


세 마디가 눌릴 때마다 제가 할 일을 배당하는 거죠. 우리 둘의 동선은 그때부터 매끄러워집니다.


새로운 낯섦도 있습니다. 현관 근처에서 바람이 문살을 흔들면 엄마는 귓볼을 만지며 ‘우야꼬’라고 속삭이십니다. 그 ‘우야꼬’ 안에는 "누군가 오나?", "내가 나가나?"같은 수십 개의 분기점이 들어 있어요. 저는 그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접습니다. “앉아서 기다리기 모드로 가요.” 그러면 엄마는 ‘아이고야꾸나’로 한숨을 내고, 기다리는 사람이 됩니다. 초조보단 난처함, 난처함보단 유머—그렇게 감정의 기울기를 조금씩 눕혀 놓는 일. 저는 요즘 그 기술을 배우는 중입니다.


가끔은 낯섦이 제 쪽으로 먼저 달려옵니다. 욕실에서 물내림 소리가 길게 내려가면, 엄마는 어깨를 모으며 ‘어머나’를 꺼내고, 저는 웃으면서 “배수구 박수치는 소리예요. 오늘 공연이 길어요.”라고 받아칩니다. 엄마가 따라 웃으면, 세계가 한 칸 밝아집니다. 말은 줄었지만, 반응의 방향은 아직 선명합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존재’의 표식입니다. ‘여기에 반응하는 몸'—그게 여전히 엄마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고야꾸나’의 의미를 요즘 새삼 배웁니다. 그 말엔 손드는 모양이 함께 실려 옵니다. ‘나 혼자는 모르겠다. 같이 해 보자.’ 존재가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 그것이 이 말의 품이에요. 저는 그 요청을 번역합니다. 설명보다 참여로, 정정보다 동행으로. 그게 돌봄에서 제가 맡은 절반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엄마가 하십니다. 짧은 말로도 세계를 여는 일. ‘어머나’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요.


낯섦이 커질수록 문장은 줄고, 대신 리듬이 남습니다. ‘어머나—우야꼬—아이고야꾸나’ 이 세 박자만 돌아가면, 세계는 아직 같이 춤춥니다.

말이 아니라 반응의 방향으로 모두를 확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