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엄마, 인연의 문턱 앞에서(아들의 메모)

아들의 메모

by stone


아침, 바닥을 옮겨 다니는 얇은 빛을 따라가 오늘의 시작선으로 삼고, 그 선 위에 이름 셋을 올린다. 외할머니, 엄마, 나. 한의원 문지방을 등떠밀던 손길, 수십 개의 문턱을 묵묵히 넘던 발걸음들, 그리고 내가 지금 넘는 아주 낮은 문턱. 사람을 움직이는 건 큰 결심보다 문턱의 미세한 경사라는 걸 배웠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름을 순서대로 불러 본다. 부르는 순간 인연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 된다. 오늘 내가 할 일은 그 현재형을 조용히 이어 가는 것, 내 차례의 한 줄을 또렷하게 써 두는 것이다.


점심 무렵, 엄마는 책상 끝을 가지런히 맞추고 수건의 결을 고른다. 나는 그 움직임에서 오래된 습관의 잔광을 본다. 몸이 먼저 나를 인도하는 장면들. 예전, 당신이 시어머니의 약봉투를 날짜별로 나누던 손놀림, 방문을 살짝 닫았다가 다시 여는 호흡,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 주던 담백함이 지금도 살아 있다. 기억은 옅어졌지만, 인연으로 이어진 손의 언어는 여전히 분명하다.


오후엔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한의원 문지방에서 건넌 그 한마디—“이번 아이는 귀한 아입니다.”—가 내 시간을 이쪽으로 돌려놓았다. 우연 같지만 오래 준비된 필연. 불교는 연기(緣起)를 말하지만, 나는 더 단순하게 그린다. 한 손길이 다른 삶을 건너오도록 이끄는 다리, 그 다리 위에서 또 다른 손길이 태어나는 그림. 외할머니의 손이 엄마의 등을 밀고, 엄마의 손이 내 등을 밀었다. 언젠가 내 손도 또 누군가의 등을 조용히 밀어줄 것이다. 아들과 엄마로 시작한 이 그림의 도식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형제자매, 이웃, 동료—가까운 시간들이 서로에게 흘렀다가 다시 흘러나간다.


가끔은 인연의 시작점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 집의 첫머리는 외할머니의 아주 조용한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셋을 돌보던 엄마의 배가 다시 불러오던 때, 외할머니는 별말 없이 엄마 손을 잡고 한의원 문턱을 넘겼다. 훗날 본인도 치매로 긴 시간을 건너가셨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마음의 더듬이가 먼 날의 그늘을 스쳐 읽었던 듯하다. “언젠가 이 딸 곁엔 기대어 설 손이 필요하리라.” 설득이라 하기엔 담담하고,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방향이 분명한 끌림—나는 그 힘을 인연의 불가피성이라 부른다. 셈과 계산으로는 잡히지 않지만, 사랑이 먼저 감지하는 깊은 질서. 그 질서가 외할머니의 발을 문턱 밖으로 밀었고, 한 생을 이쪽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온 생이 지금의 ‘나’다. 나는 저녁 무렵의 엄마를 받치는 손이 되었다. 멀리에서 시작된 물결이 이 자리의 온기로 바뀌는 법을,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그 힘은 지금도 조용히 작동한다. 치매가 낯섦을 키울 때, 먼저 움직이는 건 생각이 아니라 손과 눈빛이다. 약이 통증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의자에서 침대로, 망설임에서 결심으로 건너가게 하는 건 관계가 기억해 둔 동작들이다. 손을 쥐는 각도, 부르는 목소리의 높낮이, 잠깐 멈추어 주는 호흡. 인연은 그렇게 몸에 남아 불안의 온도를 낮추고, 다음 걸음을 내게 할 여백을 만든다.


어두워질 즈음이면 자주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올린다. 거창한 교리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 집의 작은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 네 글자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생(生)’은 엄마가 주민센터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던 그 몇 걸음—어린아이처럼 다시 태어난 듯한 그 표정을 통해 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본다.


‘노(老)’와 ‘병(病)’은 할머니의 오랜 병상에, 그리고 지금 엄마의 잦은 머뭇거림에 스며 있다. 우리는 ‘병(病)’을 병원에서가 아니라 방 안의 시간표가 조금씩 어긋나는 자리에서 배웠다.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이후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아, 할머니는 팔꿈치로 바닥을 밀며 몸을 끌어 옮겼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새벽마다 요를 갈고 비닐요 위에 홑이불을 다시 펼쳤다. 씻어도 금세 돌아오는 냄새, 쉽게 헐어 연고를 바르고 마른 수건을 덧대던 살결, 욕창을 막으려 베개 높이를 번번이 바꾸던 손길. 낮과 밤이 뒤집혀 깊은 밤에도 알아들을 듯 말 듯 말을 이었다. 문밖의 발소리는 힘들어했지만,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에게만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방 문턱에 오래 앉아 대답하는 법을 배웠다—짧게, 또렷하게, 여러 번. 손을 잡아 온기를 건네고, 미음을 식혀 한 숟갈씩 천천히 올렸다. 그렇게 우리는 통증만이 아니라 체온과 냄새, 시간의 질서까지 무너지는 일을 ‘병(病)’이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을 매일 조금씩 바로 세우는 법—숨을 세고, 자세를 바꾸고, 말을 고르는 법—을 방 안에서 익혔다.

지금의 엄마에게서도 문턱 앞의 멈칫, 말을 찾느라 고이는 숨, 숟가락 위 짧은 정지 같은 머뭇거림이 이어진다. 그 작은 지연들 속에 ‘늙음’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언젠가 올 ‘사(死)’생각한다. 우리 집에서 배운 죽음은 쾅 닫히는 문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닫혀 오는 문짝의 마찰 같은 것이었다. 불빛을 한 칸 낮추고, 베개를 조금 내려 주고, 입술을 적셔 주고, 등을 천천히 쓸어 내리며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는 걸 함께 세는 일.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주고, “여기 있어요”라고 짧게 대답해 주는 일. 창을 아주 조금 열어 공기를 바꿔 놓고, 손바닥의 온기가 식어 가는 속도에 맞춰 마음의 호흡을 맞추는 일. 죽음은 거대한 사건이라기보다, 그 작은 절차들이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왔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작은 작별의 예행연습을 한다. 불을 끄며 “오늘은 여기까지”, 문턱에서 “잘됐다”로 하루를 닫고, 내일을 위해 물 한 컵을 머리맡에 두는 일. 떠남을 미리 슬퍼하기보다, 떠나기 전까지 남아 있는 것들을 또렷이 돌보는 연습이다. 언젠가 반드시 올 그 순간을 알기에, 나는 오히려 오늘의 숨을 더 분명히 느끼려 한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네 글자는 두려움의 목록이 아니라, 마음을 곧게 세우는 네 개의 기둥이 된다. 그리고 그 기둥 사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우리들 모두의 인연은 마지막 문턱까지 서로의 손을 데려다 준다.


돌봄은 거창한 기예가 아니라, 오래된 인연을 상하지 않게 흐르게 하는 태도다. 내가 배운 건 세 가지 몸짓으로 요약된다. 첫째, 관계의 기억을 먼저 세우는 일이다. 말보다 먼저 온 표정과 몸짓 뒤에 깃든 사연을 보고, 그 연결에 먼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다. 둘째, 사이를 남겨 두는 일이다. 결정과 결정 사이에 숨 쉴 틈을 두면, 인연은 스스로 지나갈 길을 찾는다. 셋째, 호흡을 잇는 일이다. 상대의 숨결을 쫓아가거나 내가 먼저 숨을 고르게 만들어, 두 리듬이 무리 없이 만날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이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 아니다. 누구든 곁을 지키는 이라면 자신의 형편에 맞게 단어만 바꿔 붙이면 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이어주기와 놓치지 않기 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는 일일 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도 같은 인연을 적용한다. 창을 잠깐 열어 공기를 바꾸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어깨 힘을 내려놓는다. 오늘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품고, 남은 것은 내일의 나와 나눠 든다. 이렇게 내 마음의 매듭을 느슨히 하면, 인연의 끈도 덜 아프다. 돌봄은 소진의 길이 아니라, 서로의 숨이 오래 이어지도록 하루의 실밥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일임을, 나는 인연 속에서 배운다.


해가 기울어 식탁 위가 따뜻해지면, 나는 ‘문지방’을 떠올린다. 집의 문턱만이 아니라 하루 곳곳의 작은 경계들—방과 거실 사이, 침상과 의자 사이, 망설임과 결심 사이. 그 경계에서 누군가의 손이 아주 살짝 방향을 바꾸어 주면, 한 삶이 다음 자리로 무리 없이 건너간다. 우리 집에서는 외할머니•엄마•나로 이어진 ‘건너가기’가 조금 더 또렷했을 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내 일과도 문지방의 순서로 적는다. 문 열기 전 숨 한 번, 자리 옮기기 전 시선 한 번, 말 꺼내기 전 고개 한 번. 거창한 원칙이 아니라, 다음 사람을 건너가게 하는 작은 예열. 당신이 낮잠에서 깰 무렵엔 방 온도를 먼저 맞추고, 전화를 해야 할 때는 문장 두 개를 마음속에서 미리 데운다. 이런 사소한 준비만으로도 경계는 부드러워진다. 인연은 큰 제스처보다 이런 미세한 손놀림으로 오래 버틴다.


바깥에서도 문지방의 기술을 배운다. 퇴근길 마트 계산대에서 장바구니를 천천히 꾸리는 어르신 곁에선 내 속도를 늦추고, 버스에 유모차가 오르면 발을 반 걸음 물린다. 가족이 아니어도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감각—그게 인연의 보폭을 넓힌다.

결국 우리가 지키는 건 ‘우리 둘’의 사연이 아니라, ‘누구라도’의 건너감이다.


밤이면 책상 서랍에 작은 봉투를 남긴다. 내일 누군가를 도울 때 쓸 짧은 문장 하나, 건넬 손짓의 순서 하나, 비워 둘 시간 10분. 그 세 가지가 다음 날의 문턱을 낮춘다. 외할머니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듯, 언젠가 내 손도 또 다른 하루의 경계에서 누군가의 등을 아주 가볍게 밀어줄 것이다.


인연은 증명하려 들면 멀어지고, 써 보면 가까워진다. 그러니 나는 내 몫의 문지방을 닦고 낮춘다. 오늘도 한 사람의 발이 걸리지 않게, 다음 발걸음이 덜 떨리게. 그렇게 하루를 건넌다—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문득,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누군가를 떠올린다. 배경은 다르지만, 매 순간의 망설임과 후회, 사랑과 불안을 오가며 하루를 지탱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다. “우리 모두에게 문지방의 순간이 있다.” 어떤 말 한마디, 어떤 눈짓, 어떤 손의 방향이 한 생을 이쪽으로 기울게 한다. 그때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그 기울기가 오늘의 나를 어디에 세우는지, 가끔은 기록해 두면 좋다. 기록은 후회가 아니라, 다음 선택을 덜 떨리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창밖으로 바람이 돈다. 커튼 끝이 조금 들렸다가 내려앉는다. 엄마 방 문틈엔 부드러운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내 호흡을 맞춘다. 오늘도 한의원 문턱에서 시작된 오래된 한마디를 떠올린다. “놓치지 마시오.” 그 말이 시키는 대로 나는 붙잡지 않는다. 대신 스며들게 둔다. 억지로 움켜쥐면 금세 사라지지만, 함께 흐르게 두면 오래 남는다. 인연은 향처럼 움직인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향이 지나갈 자리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 그리고 다 지나간 뒤에도 방 안에 남은 은은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나에게 쓰는 짧은 메모.

• 누군가의 불편을 만나면 먼저 고개를 끄덕일 것.

• 선택지는 둘 이상 열어 둘 것.

• 내 호흡부터 확인할 것.


이 세 줄이면 충분하다. 엄마의 밤이 조용히 깊어지고, 내 마음도 너무 어두워지지 않는다. 내일 아침 창틀로 들어올 빛을 떠올리며 불을 낮춘다. 엄마와 나는 내일도 서로의 문장을 한 줄 더 이어 쓸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볍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엄마와 나에게도 계속 가능한 일이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