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답장
엄마의 답장
아들아,
네 글을 읽었다. 글자를 다 이어 읽지 못해도 종이에서 올라오는 네 마음의 온도는 알겠다. 내가 언제부터 네 기척에 먼저 반응했느냐고 물었지? 글쎄다. 아마 아주 오래전, 너를 처음 품에 올려놓던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이름과 주소는 자꾸 흐려지는데도, 네 숨이 조금만 달라져도 내 가슴이 먼저 요동친다. 머리로 챙기는 일이 아니고, 인연이 먼저 움직이는구나 싶다.
교실을 떠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겨울이었다. 분필가루가 하얗게 묻은 손을 소매로 대충 털고 창밖 눈발을 보다가, 교무실 문 앞에서 한 번 더 멈췄다. “시어머니를 혼자 두고 교실에 들어가면 마음이 자꾸 밖으로 나간다.” 그 생각이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누가 큰 결심을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 자리가 거기로 옮겨졌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날로 내 시간은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 대신 약탕기 끓는 소리에 맞춰 흘렀다. 새벽엔 미지근한 물로 어머니 입안을 닦고, 손마디가 붓는 날엔 따뜻한 수건을 데어 누르고, 밤에는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누군가 보기엔 ‘희생’이겠지만, 내겐 그저 인연이 데려간 방향이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있을 때 또 배가 불렀다. 사람들은 “이제는 그만”이라 했고, 내 속도 반쯤은 그 말에 기울었다. 그즈음 네 외할머니가 말없이 내 소매를 쓸어내리며 데리고 간 곳이 있었다. 동네에서 이름난 한의원. 미닫이를 열고 마루에 발을 올리자, 원장님은 맥도 짚지 않고 내 걸음새와 얼굴을 한 번 훑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번 아이는 귀한 아입니다. 놓치지 마이소.” 흔들리던 마음의 저울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제 돌아보면, 그 발걸음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이 실려 있었던 것 같다. 훗날 네 외할머니도 기억의 숲에서 오래 헤맸지. 그 일이 닥치기 훨씬 전이었는데도, 외할머니는 먼 날의 그늘을 어렴풋이 읽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내 곁에 등을 받쳐 줄 사람이 필요하리라는 생각—그래서 하나의 생을 이쪽으로 데려오려 했던 걸까. 우리는 계산으로 아이를 품지 못한다. 다만 사랑은 가끔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물길의 방향을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몸을 그 흐름으로 이끈다.
그렇게 태어난 네가 지금 내 저녁을 붙들어 준다. 약 봉지를 정리해 주고, 불을 낮추고, 밤마다 내 손을 찾아 쥔다. 그 장면들 속에서 나는 둥글게 돌아오는 순환을 본다. 오래전에 네 외할머니가 내 등을 밀었던 힘이, 대를 건너 네 손에서 다시 따뜻해진다. 인연이란 게 그런가 보다—멀리서 시작해도 마침내 가까운 자리에서 온기를 자아낸다.
주민센터 앞에서 네가 서 있던 날, 내가 왜 어린아이처럼 달려갔느냐고? 머리로는 설명 못한다. 다만 몸이 먼저 네쪽으로 향했다. 그 몇 걸음이 내겐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이름은 잊어도, 방향은 남는다. 내 방향은 네쪽이었다.
네가 쓴 말들 중에 “역할의 교대가 아니라, 이어 쓰는 문장”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남는다. 맞다. 네가 지금 하는 일은 내 문장의 다음 줄이다. 내가 시어머님 곁을 지키던 날들의 호흡과 손놀림을, 네가 오늘 내 곁에서 새로 배우고 또 다르게 쓰고 있다. 그것을 알면 미안함이 줄고, 고마움이 진해진다. 나는 이 일의 뜻을 어렵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어 서도록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네가 내 안부를 묻듯, 너도 다른 이의 안부를 묻고, 또 누군가 네 안부를 물을 것이다. 인연은 그렇게 돌고 돈다.
너는 가끔 얼굴에 피곤이 내려앉는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빌곤 한다. “오늘은 불을 조금 일찍 끄자. 싱크대의 그릇들은 잠시 쉬게 두자.” 오래 가려면 먼저 숨을 고르는 게 순서다. 이 말은 너 하나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곁을 지키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잠깐의 쉬어감이다. 나처럼 많은 것을 잊어가는 사람도, 너처럼 많은 것을 기억하려 애쓰는 사람도, 각자 자기 호흡을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야 곁이 길어진다.
아들아, 나는 예전처럼 길게 쓰지 못한다. 그래도 너의 이름을 부르면 마음이 밝아진다. 오늘 밤도 네가 내 손을 한 번 눌러 주면, 나는 그 눌림을 믿고 눈을 감겠다. 내일 아침 빛이 창틀을 넘어올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줄을 이어 쓰겠지. 그걸로 충분하다. 나를 낳아 준 우리 어머니에게, 우리 어머니를 세상으로 보낸 외할머니에게, 그리고 너에게 고맙다. 사람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늦게 배웠지만 분명히 안다.
오늘은 여기까지. 너도 쉬어라. 나는 네가 곁에 있어 편안하다.
너와 맺은 인연의 한 끝에서,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