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받아들이며 멈추고, 거부하며 나아간다(아들의 편지

아들의 편지

by stone

엄마,


오늘도 새벽, 첫 김을 머금은 냄비 뚜껑을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가장 먼저 스며오는 건 강황의 노란 숨, 곧이어 단맛을 터뜨리기 직전의 양파 기척이 따라옵니다. 국자를 들어 올리며 나는 스스로에게 짧게 묻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돌아설까.” 치매에 강황이 좋다는 말을 들은 뒤로, 나는 아침을 카레로 정했습니다. 돌봄의 10년 내내 반찬을 제외한 메인 메뉴로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고민을 지우고, ‘함께 먹는다’는 약속만 남기기 위해서였지요.


한 번에 일주일 치를 지어 두고 아침마다 한 국자씩 덜어내는 이 방식은, 내겐 살아내기 위한 기술이자 당신을 향한 지속 가능한 애정의 형태입니다. 매일 새로 끓이는 ‘정성’ 대신 오래 버틸 수 있는 ‘성실’을 택한 셈이지요. 효율을 명분으로 골랐지만, 그 결과 변하지 않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아침은 반드시 열린다.’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한 끼를 함께 건넨다.’


남이 보면 ‘변화 없는 식단’일지 모르지만, 제게는 ‘측정 가능한 사랑’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양, 같은 순서를 지켜 엄마의 하루 첫 장을 열어 드리는 일이라서요. 양자역학에 비유하자면, 저는 매일 같은 방식으로 엄마의 파동을 관측해 드리는 셈이에요. 관측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지니, 관측을 일정하게 유지할수록 우리 집의 세계는 한결 고요해집니다.


이 일주일짜리 약속은 생각보다 많은 결정을 덜어 줍니다. ‘오늘은 못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물리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안도를 들입니다. 그 작은 안도가 하루의 척추를 곧게 세웁니다. 어떤 날은 감자가 살짝 단단하고, 또 어떤 날은 양파가 유난히 달아 ‘오늘’의 기분을 정합니다. 같은 냄비인데도 맛이 달라지는 건, 아마도 나의 손, 당신의 컨디션, 집안의 공기까지—우리가 매 순간 내려온 크고 작은 선택들이 그릇 위에서 현실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존재도, 돌봄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평일엔 방문요양 선생님이 오십니다.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직장인의 얼굴을 쓰고 사회의 의자에 앉습니다. 그 시간은 또 다른 나의 숨고르기이고, 내가 사회적 자신을 잃지 않는 최대치의 자리입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의 거울이 비추는 건 늘 두 사람입니다. '엄마 곁의 아들'과 '세상 속의 나' 두 인물이 겹쳐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면 한쪽이 선명해집니다. 당신의 눈이 나를 붙잡는 순간, 나는 다시 아들로 ‘확정’됩니다. 그 확정이 어떤 날은 기쁨이고, 어떤 날은 아쉬움이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 둘을 동시에 쥘 수 없을 때, 나는 그 아쉬움은 저녁 바람처럼 흘려보내고,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야 내일을 견딜 힘이 남습니다.


주말이면 엄마와 나는 공원으로 나가 천천히 걸으며 네잎클로버를 찾습니다. 발목이 불안한 경사와 거친 바람은 돌아서 지나치고(거부), 잔디의 잔빛과 잠깐의 그늘은 머물러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교대하는 거부와 받아들임의 리듬이 두 사람의 하루 속도를 정하고, 그 안에서 나는 오늘의 엄마를 선택합니다.


산책은 의외로 많은 결정을 요구합니다. 횡단보도에서 “이번 신호는 보내자”라고 말하는 것, 급경사 대신 우회로를 택하는 것, 벤치가 비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앉는 것. 위험과 소란을 ‘거부’하고, 조용한 빛과 서로의 호흡을 ‘받아들이는’ 선택들이 이어집니다. 무릎이 뻐근해 오면 나는 속도를 내리는 대신 여유를 보태고, 당신의 숨이 짧아지면 다음 그늘이 보일 때까지 이야기로 시간을 늘립니다. 이 작은 의사결정들이 모여, 하루의 실패를 줄이고 존엄을 키웁니다.


네잎클로버는 확률의 식물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먼저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를 받아들입니다. 대신 내가 집요하게 붙드는 건, 둘이 같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같은 풀밭을 한눈 금지로 훑는 그 시간이지요. 그날도 나는 잎맥을 더듬으며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었고, 엄마는 내가 뭘 찾는지 모른 채 옆에 살짝 앉아 흙냄새를 들이마시며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조심히 잎사귀 하나를 집어 올려 내 손바닥에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거 아이가?”

펼쳐 보니 클로버가 아니라 그저 들풀의 잎사귀 하나였습니다. 가슴이 잠깐 오그라들었다가, 입꼬리보다 마음꼬리가 먼저 풀렸지요. 찾던 건 아니었지만 같이 찾으려는 마음은 정확했으니까요. 그때 알았습니다. 그날의 ‘행운’은 네 번째 잎에서가 아니라, 들풀 한 장을 살며시 내어 주며 내 수색에 서툴게 합류해 준 그 손짓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기적은 통계가 아니라 태도, ‘없을 수도 있어’를 끌어안고 나란히 고개 숙이는 그 자세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나는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건 욕심을 비우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와 당신에게 유효한 것을 골라 쥐는 일입니다. 거부 역시 도망이 아닙니다. 다치게 할 가능성, 소란만 남기는 갈래길, 불필요한 미안함을 밀어내는 일. 둘은 한 쌍의 근육처럼 돌아가며 긴장을 나눕니다. 나는 이 근육을 하루의 리듬으로 단련 중입니다.


실패도 많습니다.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 앞에서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저를 발견할 때, 나는 즉시 한 발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말을 줄이고 물을 한 모금.” 내가 나를 다잡는 이 짧은 문장은, 돌봄의 언어가 아닌 나를 위한 언어입니다. 나를 돌보는 일을 ‘받아들여야’ 당신을 더 오래 돌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부엌의 큰 냄비가 화면 전환처럼 떠오릅니다. “일주일 분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불안을 거부하고, 준비된 안심을 받아들이는 단서 하나—그게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합니다.


돌아보면, 주말 산책길은 엄마와 내겐 작은 ‘학교’였습니다. 잔디의 결을 읽는 법, 바람의 방향을 눈치채는 법, 그늘을 먼저 발견해 기회를 만드는 법. 무엇보다 서로의 속도에 맞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이 멈출 때 나는 멈추고, 내가 멈출 때 당신은 눈으로 “괜찮다”를 건넵니다. 그 상호 신호가 쌓여 한 덩어리의 리듬이 됩니다. 그 리듬 속에서 나는 오늘의 엄마를 고르고, 오늘의 나를 고릅니다. 선택의 결과가 늘 완벽하진 않겠지만, 선택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남는 기술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저녁이면 냄비를 다시 덮습니다. 남은 양을 대충 가늠해 보며, 내일 아침의 평온을 예약합니다. 그 다음, 주머니에서 공원에서 주운 작은 잎사귀 하나를 꺼내 책 사이에 끼워 둡니다. 네잎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지나치고, 어디에 머물렀는지—그 기록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내일도 국자를 들어 올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과 공원으로 나가, 위험은 거부하고 쉼은 받아들이며, 그날의 네 번째 잎을 찾아볼 겁니다.


‘찾으면 감사하고, 못 찾으면 내일 또 찾으면 됩니다.’ 이 단순한 문장이 요즘 내 삶의 가장 믿을 만한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