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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Mar 29. 2021

# 3. 폭력과 이데올로기(2)

<안택굿>과 효(孝) 이데올로기

"자식은 죽으면 또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한 번 돌아가시면 아주 영영 돌아가십니다."

김복순 구연, 임석재‧장주근 조사, <안택굿(安宅)>(1965)



<도랑선비 청정각시>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이 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개인이 그 폭력을 받아들여 내재화 함으로써 자발적인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자연스럽게 폭력은 열녀 만들기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여지게 되고, 청정각시가 기쁘게 맞이한 행복한 결말은 완성된 가족을 전시(展示)하며 마침내 청정각시에게 향했던 폭력을 은폐해버립니다. 청정각시의 처절한 고난과 슬픔의 눈물은 모두 이런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며 말이죠.


그런데 열 이데올로기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바로 효(孝) 이데올로기입니다. 효는 주로 직계 존속(尊屬)의 평안을 위해 직계 비속(卑屬)이 수행하는 일련의 행위와 태도를 일컫습니다. 기본적으로 '효'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존속과 비속이라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 관계는 가족공동체를 구성하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집단의 문제로 빚어질 수 있습니다. 직계 비속은 자식으로서 또는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효자나 효녀로 호명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역시 모종의 폭력이 작동하기도 합니다. 마치 심청이가 아버지인 심학규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효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것처럼 말이죠.


효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신화가 <안택굿(安宅)>입니다. 함경도의 망묵굿에서 구연되는 <안택굿>은 ‘효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런 폭력을 지워나가는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는 신화입니다. <안택굿>은 망묵굿에서 연행되지만, <도랑선비 청정각시>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망묵굿은 크게 '이승 길'을 닦는 굿거리와 '저승 길'을 닦는 굿거리가 있습니다. 망묵굿에서 본격적으로 망자와 만나기 위해 '저승 길'을 닦는데, 그전에 <안택굿>과 <대감굿>이라는 신화가 구연됩니다. <안택굿>은 '앉인굿'이라는 굿거리에서 구연되며, 여러 신들 중에서 특히 땅의 신인 지신(地神)을 정성으로 모시기 위해 마련된 절차입니다. 따라서 <안택굿>은 죽은 자를 위한 신화가 아니라, 본격적인 굿을 진행하기 전에 굿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땅의 신을 위로하기 위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택굿>은 지금까지 총 1편의 각편(version)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복순이라는 무당이 부른 <안택굿>이 그것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성이 지극하면 지신(地神)도 감천(感天)한다는 말이 있다. 정성이 지극하면 죽은 인간도 살아나고 앓던 인간도 낫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는 법이다.

옛날 옛 시절에 '지신' 할아버지, 그의 아들 '정신'이와 손자 '감천'이가 살고 있었는데, 감천이는 오대 독자였다. 감천이가 6~7세가 되었을 때 집에 독서당을 지어놓고 공부를 하다가, 안헤산 금상절에 3년 동안 글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때 감천이의 할아버지가 태산 같은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감천이의 아버지는 유명한 점쟁이 '대산천' 댁에 가서 병을 고칠 방법을 물었다. 대산천 댁은 삼 년 묵은 닭의 피와 두개골을 구해서 약으로 쓰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 못하면 오대 독자 외아들을 죽여서 약으로 대신 쓰라고 했다. 감천이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후 너무 끔찍한 마음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천이의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채근하자 그때서야 감천이의 아버지는 감천이를 약으로 써야 한다는 말을 했다. 감천이의 어머니는 자식이 죽으면 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감천이를 약으로 쓰자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금상절로 길을 떠났다.

감천이의 어머니가 금상절에 도착했다. 감천이의 글 선생은 생불 부처 성인(聖人)님이었다. 옥황상제는 감천이의 어머니가 참 효부(孝婦)라고 하면서, 성인님에게 감천이의 모습을 한 인삼을 대신 내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성인님은 옥황상제의 분부대로 인삼을 감천의 모습으로 바꾸고 감천의 옷을 입혀서 감천이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집에 도착해서 감천이의 부모는 숯 위에서 약탕물을 끓였다. 감천이의 어머니는 감천이에게 3년 동안 글공부를 하느라고 몸이 깨끗하지 않으니 목욕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감천이를 들어서 끓는 약탕물에다가 집어넣었다. 그 약을 다려서 감천이의 할아버지에게 올리니, 할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날이 지나서 감천이의 할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글공부를 떠난 감천이가 자기가 병에 걸려 아팠는데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 대답을 못하던 감천이의 부모는 수심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다가 눈이 어두워져서 장님이 되었다.

한편, 글공부를 마친 감천이는 세상의 지식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할아버지에게 문안을 올렸지만, 할아버지는 괘씸해하며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감천이는 이어서 부모에게 문안을 올렸는데, 부모는 죽은 아들이 귀신이 되어 돌아왔다며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감천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자기 대신 인삼을 내려보냈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제야 감천이의 부모는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감천이가 이 사실을 나라에 고하자, 나라에서는 감천이의 어머니에게 효부문(孝婦門)을, 아버지에게는 효자문(孝子門)을 내리고 많은 쌀과 돈도 챙겨주었다. 그때부터 열녀문(烈女門), 효부문, 효자문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렇게 하여 집집마다 '성주 안택 받기' 마련하는 법이 생겼고, 감천이 할아버지는 지신(地神)이, 감천이 어머니는 성주신(城主神, 成造神)이, 감천이 아버지는 안택신(安宅神)이 되었다.


<안택굿>에는 '할아버지-아들 내외-손자'로 구성된 가족공동체가 등장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들 내외가 각각 땅의 신과 집의 신으로 좌정하는 과정이 효행담의 형태로 서사화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효행 설화를 보면, 유독 '희생을 통한 효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많습니다. <안택굿>은 그중에서도 <동자삼>이라고 불리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택굿>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지신 할아버지가 '태산 같은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가족공동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어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가족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가족공동체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대 독자인 손자 감천이를 희생시켜 약으로 써야 합니다. 살아있는 손자를 약으로 써서 할아버지의 병을 고친다는 상상력은 현실의 차원을 넘어섰죠. 그래서 이 부분은 '제의적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지라르(René Girard)에 따르면 제의적 희생은 두 가지 '대체'에 의해 작동됩니다. 첫 번째 대체는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위기의 원인을 단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희생양'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희생양으로는 보통 '정상'의 범주 밖에 있는 존재가 선택됩니다. 노인이나 여성, 아이, 노예 등이 대표적인 희생양 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택굿>에서는 감천이라는 아이가 희생양으로 선택됩니다. 자식은 죽어도 또 낳으면 된다니, 감천이는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말 그대로 치료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감천이가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가족공동체 내부에 있는 아이를 살해한다는 행위 자체가 긍정되기는 어렵겠죠. <안택굿>에서 자신들의 아이를 살해한 감천이의 부모가 수심에 휩싸여 장님이 되었다는 설정은 그런 살해행위가 절대로 수용 가능하지 않으며 윤리적 질타와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살해행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대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대체 즉, 본래 희생제의의 제물로 지목된 존재를 ‘희생시킬 만한 범주에 속하는 제물’로 다시 바꾸는 것입니다. 희생시킬 만한 제물은 본래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던 존재와의 유사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둘 간의 구분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안택굿>에서 감천이의 모습을 하고 감천이의 옷을 입은 '인삼'의 등장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의 대체 과정을 통해 제의적 희생은 '효'라는 이름으로 완성됩니다. 부모를 위해 하나뿐인 오대 독자를 희생시킨 아들 내외의 지고지순한 마음은 유지되고, 알고 보니 희생시킨 것은 아들이 아닌 인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감천이의 부모는 자식을 살해했다는 윤리적 질타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장님이 되었던 감천이의 부모가 눈을 뜨는 장면은 '자식 희생'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더욱이, 그 이후에 나라에서 효부문과 효자문을 하사했으니, 공인된 보상을 통해서 감천이의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려고 했던 움직임은 어느 순간에 누구나 본받아야 할 효행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도랑선비 청정각시>에서 청정각시에게 가해진 폭력이 남성적 상징질서 안에서 열(烈)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며 은폐되었듯이, <안택굿>에서는 감천이에게 가해진 폭력이 가족공동체 안에서 효(孝)라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정당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안택굿>은 결국 할아버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신(地神)을 위무하는 제의적 기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 살해는 땅의 신을 향한 기원의 행위라는 측면에서 다시 한번 정당화됩니다. 어떻게 보면, <안택굿>은 <도랑선비 청정각시>보다 더욱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해로운 폭력을 마치 이로운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부분 가족공동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쉽게 배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효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안택굿>에서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효자나 효부 되기라는 프로젝트 속에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폭력의 정당화가 두 번에 걸친 '대체'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부모를 위한 자식 살해 외의 선택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안택굿>을 보면, 오대 독자인 감천이를 살해하는 것 외에도 분명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방법이 있었습니다. 삼 년 묵은 닭의 피와 두개골을 구해서 약으로 써도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아마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잔인하고 끔찍하지만 더 쉬운 방법, 다시 말해 언제나 대체 가능한 아들을 살해하는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안택굿>은 희생을 통한 효의 성취와 신을 위한 희생제의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대체에 대한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효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결합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런 '또 다른 선택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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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박무호 옮김, 『희생양』(신장판), 민음사, 2007.
심우장, 「효행설화와 희생제의의 전통」, 『실천민속학연구』10, 실천민속학회, 2007.
신호림, 「희생대체의 원리와 <동자삼>의 제의적 성격」, 『우리문학연구』43, 우리문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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