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읽으며 삶의 의미를 묻다

by 김남정

어떤 책은 읽는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한국어판 발매 20주년 기념, 2025년 9월 출간)가 나에게 그랬다. 오래전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던 시절에는 '극한 상황 속 인간의 존엄'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주제로 이해했다면, 이번 20주년 기념판을 다시 펼쳐 들었을 때는 훨씬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지금 나는 어떤 의미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나는 어떤 태도로 응답하고 있는가.


image.png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국어판 발매 20주년 기념 ⓒ 청아출판사


"삶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행동으로 대답해야 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흔히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프랭클은 그것이 '응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에는 니체의 문장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프랭클은 이 말을 단순히 인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빼앗긴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고, 가족과의 관계는 단절되며, 인간다운 생활 조건은 완전히 붕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빼앗기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그는 말한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단 하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고. 이 부분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우리가 상황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선택할 수 있다. 절망 속에서도 존엄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무너질 것인지는 끝까지 남겨진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선택이 반드시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엄을 지킨다고 해서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존엄을 포기한다고 해서 생존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프랭클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생존에는 분명 운의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책 속의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다시 떠오른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고통의 의미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의미를 향한 의지'를 목격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시기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매일의 삶이 또 얼마나 풍요롭게 목적 있는 것으로 채워질지 상상만으로도 뜨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프랭클이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는 순간이다. 실제로 그녀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육체적으로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사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이 고백은 단순한 감상적 표현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끝내 남아 있던 하나의 진실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 조건 속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일상 속에서 너무 쉽게 사용되던 이 말이, 극한의 상황에서는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깊이 와닿았다. 동시에 그런 상황이 내 삶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언제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 겹쳐지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책의 후반부는 프랭클이 창시한 '로고테라피' 이론을 설명한다. 로고스, 즉 '의미'를 중심에 둔 이 치료법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쾌락을 향한 의지', 아들러의 '권력을 향한 의지'와는 분명히 다른 방향이다. 프랭클에게 인간은 무엇보다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이 관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종종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질문을 외면할수록 삶은 공허해진다. 반대로, 비록 작고 개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떤 책임이나 사명이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 의미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절실한가'가 중요하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삶의 의미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아주 개인적이고, 때로는 사소해 보이는 이유들이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밀도를 갖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럴 때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인간 개개인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순한 생존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이자,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한 인간의 응답이다. 시련 속에서도 삶의 이유를 찾고 싶은 사람, 혹은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분명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시 책을 덮으며, 지금 나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읽고, 쓰고, 사유하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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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1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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