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감상문

내게 강 같은 평화^^

by Rx

나의 꿈은 도인이다. 내 꿈의 실현장은 산속이 아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그램을 웬만해서 보지 않는다. 첫째 그들은 대체로 못생긴데다 궁색하고 그들의 산 중 생활 흔적들이 자연연으로 불리기엔 또 다른 자연 파괴로 보이고 현실 도피의 기행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이따위 말을 함부로 내뱉는 나는 지독한 편견으로 세상을 보는 못생긴 속물 외모 지상주의자임을 밝힌다.



“사는게 돌이켜 보면 남 치다꺼리, 도 닦는겨” 뭐하나 뜻대로 고분고분 살 수 없었던 70세 박 여사님께서는 남편 없이 애 둘을 키우는 나에게 당신처럼 장군같이 살라 주문하신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하자고 강권하신다. 예수 말고는 다른 길은 없다며 틈만 나면 나의 행로에 끼어들어 교통정리를 하신다.



여러 종교단체를 기웃대며 나는 분통이 터졌다. 믿는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사는 인간은 없어 보였다. 그것은 종교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디를 비춰도 인간들 중에 인간답게 사는 인간들은 없어 보였다. 나의 인간 혐오는 나의 오만에 오는 야만 행위임을 알고 있다.



폭주하는 나의 야만성은 늘 자해와 자학으로 대충 뭉개고 속 끓이기 일쑤였다. 어마어마한 집단적, 권위적 세상의 힘에 눌린 개인의 야만성은 분풀이할 대상도 없이 <킬빌>같은 피범벅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해야만 했다. 내 안에는 히틀러 같이 정신 나간 빌런들이 신념처럼 자리 잡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브라만 성직자 계급으로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싯다르타라는 인물을 내세워 구도의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꽃미남에 뇌섹남이다. 모두 그를 사랑하지만 싯다르타는 제사나 경전에 몰두하는 행위에 안식을 얻지 못했다. 모든 것은 폐기될 운명처럼 보았고, 자신의 자아로부터 육체적 본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극복하려고 했고, 죽이고자 했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초탈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고, 무아의 경지를 묵상함으로써 열반에 이르고자 했다.



그는 부모와 친구 고빈다에게 독립하여 자신만의 순례길을 떠나기로 선언하지만, 이별은 분노, 불안, 고통, 염려로 쿨하지 못하다. 축복과 축원으로 감사한 안녕은 세속의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들로 쉽지가 않다.



세상에 던져져 살아가는 군상, 그 무리의 행진. 도대체 끝이 없는 길이다. 다리는 아프고, 나보다 앞서가는 년놈들도 가다가 죽는다. 나는 내 새끼들을 양손 꼭 쥐고 걷는다. 피로 붙은 가족은 행진의 고통 속에서 뒤엉켜 동반자는 고사하고 도반이 되지 못한다. 원망줄을 붙잡고 가는 피붙이들. 전생에 원수들이 만나 이생에 앙갚음을 하려고 작정한 듯한 무리도 보인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나는 헐벗고 퉁퉁 부은 내 발에 로켓 부스터를 달아 내 자식을 태우고 날아가고 싶다. 축지법이라도 배우면 좋을까 싶다. 세월은 엄중하고 나의 발자취는 부끄럽고 늙어서 소진되는 육체적 한계를 도박질이라도 해서 일시에 만회하고 싶다. 내 자식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미친 모성이다.



종교라는 신성한 화살에 맞아 상처받은 가슴이 있다. 모태신앙의 굴레에 갇혀 분수처럼 피가 철철 날까 그 화살 뽑지도 못하고 그대로 산 적이 있었다. 뜨거운 상처로 분기탱천하여 유물론적 우주로 내달리기도 했고, 이제 하다 하다 작은 원자 미립자까지 탐구해야 하나? 배움은 자존하려는 자에게 필요 이상의 요청이었다. 나의 자문은 아둔한 지능과 무식한 지적 칼날로 인해 무엇 하나 썰어낼 수 없는 우문이 된다. 무지몽매한 자의 경험치가 주관적 신념이 되는 순간이다.



나란 인간 사는데 참으로 이딴 게 뭔 소용이란 말인가. 쓸데없이 진지하게 골몰하고. 뜬구름 잡아채 채집통에 넣기는 넣었는데 과연 그 안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 도망가고 없다. 나는 도시에 사는 괴인이다.



몇 년 전 힌두교 수행으로 가족을 떠나 1973년부터 약 45년간 오른팔을 들고 살아온 인도 남성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오른팔은 왼쪽과 달리 앙상하게 마른 막대기처럼 굳어지고 손톱과 손가락은 엉겨 붙어 있었다. 고통 속에서 감각을 잃어버린 그의 수행에 대한 의지가 인상 깊었다. <싯다르타>의 사문 편을 읽을 때 그가 떠올랐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사실 감동도 받았다. 구도의 열정 그것만으로도 자체로 경애심이 들었다. 그러나 훗날 내 자식이 그런 고행길을 간다 했을 때는 아마도 해준 것도 없으면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며 등짝을 후려갈길 법한 분명한 전형적 한국 엄마다. 제발 정신 차리자. 보내주자. 내가 미래의 나에게 부탁한다.


"내 오른팔은 하늘만 향한다"…팔 들고 45년 인도 남성



싯다르타는 자신의 순례길 끝에 강을 만난다. 자살하려던 강물 속에서 ‘옴’을 듣고 각성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친구 고빈다는 그를 기다려줬고, 뱃사공(바스데바)은 그에게 강 건네주는 법과 끊임없이 흐르는 강으로부터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싯다르타와 달리 부처(고타마)에 귀의하여 구도의 길을 택한 고빈다가 알든 모르든 죽은 듯 자는 싯다르타를 기다리며 지켜주었다는 것이 내게는 감동이었다. 오랜 시간 방황 끝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돌아올 때 기다려주는 이, 그 순간을 환영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기적같은 해피엔딩 아닌가. 떠날 때 다시 만날 때 모두 감사함이었다. 늙은이가 된 싯다르타는 뱃사공이 되어 사람들을 태워 건네주는 자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틈으로부터 가시적 현상계에 대한 본질을 말이 아닌 입맞춤으로 고빈다에게 보여준다.



욕망의 무한한 힘, 세속의 생명력은 결코 가치절하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두 발을 붙여 뿌리를 내리고 관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속인으로 그 강을 넌지시 바라보기도 하고 물을 끼얹어 흠뻑 젖기도 한다. 나의 정력이 나의 영혼이 그 강을 노질할 수 있을지 그것이 허락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뱃사공에 욕심을 내어 나룻배나 뗏목은 커녕 강물에서 거대한 배를 만들고 해적질을 하는 인간들도 있지 않은가. 나는 종이배를 띄우든, 수영을 배워야겠다.



우리는 어쩌다 옴에서 빅뱅으로 빵 터져나와 각자의 독자적인 법칙에 의해 궤도를 그리는 행성이다. 기묘한 우회로 끝에 인연으로 만나 미치고 팔짝 뛰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대환장 파티.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 물거품이 되어 결국 하나로 동류 된다. 나는 주인 없는 강물을 길어 오늘 밥 짓고 빨래하고 씻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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