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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석 Feb 07. 2023

17세기 조선과 일본을 뒤흔든 무기 밀수사건

- 350여 년 전, 조일(朝日) 간 최대 무기 밀수 사건의 진실은? 

                                                           

  1667년 11월 그믐날. 일본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됐다. 에도 막부에 의해 이토 고자에몬이란 상인과 그 일당이 책형(磔刑)에 처해진 것이다. 책형이란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늑골 아래로 창을 깊숙이 찔러 죽이는 잔혹한 형벌이다. 이들은 어떤 범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극형을 당했을까? 죄목은 무기 밀매였다. 일본에서 수출을 금지한 무기류를 조직적으로 조선국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약 350여 년 전 일본 열도를 뒤흔든 대규모 국제 무기 밀수 사건이다.    


  일본과 조선의 밀무역 관련 기록은 양측에 많이 남아 있다. 일본의 사료로는 범과장(犯科帳)이 있고 조선에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실려 있다. 범과장은 에도시대 나가사키를 관할하던 나 가사키부 봉행소의 범죄사건 판결문이다.     


  범과장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범죄기록이 이토 고자에몬이 주도한 조선과의 무기 밀수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재판받은 사람이 100명이나 되고 사형당한 사람이 43명이나 된다. 이토 고자에몬을 비롯한 주동자 5명에게는 책형에 처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되고 처형된 에도 막부시대 초기 최대의 밀수사건이었다. 17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나가사키에 거주하고 후쿠오카에 집을 갖고 있는 이토 고자에몬은 (1667년) 나이 49살이다. 묘진 양년(1665,1666년) 대마도 상인들과 공모 돈을 모아 두 해 다 배를 마련하여 조선국에 무기를 팔았다. 이에 올해 11월 그믐날 책형에 처했다.” 

                                                 - 범과장에 기록된 무기 밀수사건 주범 이토 고자에몬 관련 내용

     

 범과장에는 조선에 무기를 팔아넘긴 시기를 묘진 양년으로 적고 있다. 묘진 양년은 효종의 뒤를 이은 조선 18대 왕 현종 때다. 이 밀수사건과 관련해 조선은 과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이토 고자에몬이 무기 밀수를 했던 1660년대 중반의 조선 측 사료에는 일본 배가 남해 가덕진과 용초도에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년 가을(1663년) 왜인들이 유황 1만 3천6백여 석을 싣고 어둠을 틈타 가덕도에 정박하였다” - 비변사등록 현종 5년(1664)      

  “1665년 일본인들이 탄 배가 몰래 용초도로 들어왔다. 왜인들이 탄 배 한 척이 몰래 용초도에 정박하다” - 현종 개수 실록 6년(1665)     


  일본 밀수선에는 다양한 일본제 무기들과 전쟁 물자가 실려 있었다. 활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흑각, 조총과 장검 등도 있었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품은 유황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관련 사료와 당시의 정황을 종합해 보면 1660년대 일본의 밀무역 조직은 조선에 불법으로 대량의 일본제 무기류를 팔아넘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항으로 조선에서 유황을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유황은 화약 제조 원료로 일반 상인이 취급하는 물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누가 어디에 쓰려고 유황을 밀수입했을까?     


  일본으로부터 무기류 밀수입은 그 당시 대외 정세와 조선의 북벌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토 고자에몬 밀수사건이 적발된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69년, 병자호란이 끝난 후 30년이 지난 1667년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군의 화약무기인 조총의 위력에 놀랐다. 이후 병자호란에서도 청에 크게 패하며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조선에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효종 때는 이완을 대장으로 삼아 총기를 개량하고 조총병 양성 등 군비 강화에 힘을 쏟았다. 17~18세기가 되면 조총병이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조총병 양성과 유지에는 막대한 양의 화약이 필요했다. 문제는 화약의 원료인 유황이 당시 조선에는 나지 않는 물품이었다는 것이다. 유황은 그동안 일본 에도 막부의 승인을 받은 정식 무역품으로 두모포 왜관을 통하여 들여오고 있었다. 그러나 1621년 일본이 갑자기 무기 수출 금지령을 내려 무기와 유황의 해외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상인과 역관 등을 일본 상일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게 하여 유황을 밀수입하게 된다. 조일 간 무기와 유황 밀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조선의 수요는 많은데 공식적인 무기 수입 통로가 막히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광범위한 무기 밀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조선에서 상인이나 역관을 통해 무기류 구입 의사가 일본 측에 전달되면 일본의 밀수조직이 오사카, 하카타, 미야자키 등에서 물건을 확보해 조선에 넘겼다. 이때 무기 밀수를 주도한 인물이 나가사키의 상인 이토 고자에몬이었다. 그는 동아시아권을 상대로 한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 최대의 무역상인이었다. 그의 재산은 당시 에도 막부의 예산보다도 많았으며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최고의 부자였다.      

  17세기 무기 밀수는 일본 무기류를 필요로 하는 조선 측의 사정으로 시작됐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무기류 밀수가 조선 조정의 고위 신료와 국왕까지 나서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현종 6년 을사(1665) 7월 29일(계축) 자 기록을 보자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김근행(金謹行)이 유황을 밀거래하기로 약속했던 건은 지금 여쭈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수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전에는 1만 5천여 근이었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정부(政府)의 노복이 면천(免賤) 하기 위하여 밀무역하여 온 것입니다. 대개 이 일은 고 상신(相臣) 원두표(元斗杓)가 재직하던 당시에, 비국(비변사)이 역관에게 분부하여 은밀히 장사꾼으로 하여금 저들에게 가서 약속하고 오게 한 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위 기사에 나오는 원두표는 좌의정으로 훈련대장 이완과 함께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핵심 인물이다. 김근행은 역관으로 무기와 유황을 밀수입하는 데 공을 세워 포상으로 높은 벼슬을 받았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이루어진 17세기 무기류와 유황 밀수는 조선 조정의 지시와 비호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의 파장은 컸다. 조선은 밀수입에 의존하던 유황 공급이 끊기자 당장 군비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게다가 일본은 조선에 대해 사건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조선을 압박해 왔다.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린 조선은 이 사건에 대한 관련을 부인하면서 그동안 일본이 끈질기게 요구해 왔던 왜관의 확장 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후에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왜관이 이전된 배경이다.     

  

  한편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 유황 광산 개발에 적극 나서는데 이때 활약한 사람이 이의립이다. 그는 경주 만호봉에서 유황 광산을 찾아내 자취법이란 신기술로 유황 생산에 성공한다. 이후 조선은 전국에 많은 유황점(유황광산)을 개발해서 유황군이란 전문적으로 유황을 채취하는 특수군인까지 두고 국내 수요에 충분한 유황을 생산하게 된다. 그동안 일본으로부터 밀수에 의존하던 유황의 국내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보면 작년 일본이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불화수소를 우리나라에 수출 금지 한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다. 우리 시대에 제2의 이의립 같은 인물이 나타나길 고대해 본다.    

 

 17세기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대륙에서는 명과 청의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의 멸망과 도쿠가와막부가 성립된 때다. 이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난을 연이어 당하여 국가 존망의 위기를 겪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대변동 상황에서 강대국 사이에 낀 조선이 국방력 강화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유황을 밀수입한 것은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무기 밀수사건을 보면서 당시 조선의 깊은 고뇌를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참고 자료     

- 17세기 후반 한일 간의 무기 밀수 사건에 대하여 (논문)     김문경

- KBS 역사 스페셜(2012. 2. 16. 방영)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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