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굴비와 이자겸 이야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굴비! 란 우스갯말이 있다. 이처럼 영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굴비다. 영광 읍내 간판 절반 이상은 굴비 자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옛날부터 영광은 바로 앞 서해 칠산 바다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조기를 말려 만든 굴비의 산지로 유명했다. 좀 보태서 영광은 지금도 물 반 굴비 반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굴비와 관련된 인물이 하나 있으니 그가 바로 고려 시대의 권신 이자겸이다. 여기서 굴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광 굴비와 이자겸과 사이에 얽힌 이야기가 탄생했다.
이자겸은 고려 "인종" 때인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고려 최고 문벌 귀족 인주 이씨 가문의 권신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실과의 혼인"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그의 가계도를 보면 현재 우리의 시각으로는 좀 엽기적이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고려 16대 왕인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아들 17대 "인종"에게는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연거푸 시집보냈다. 겹사돈이 아니라 겹 장인이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매 간인 이자겸의 딸들에게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이다. 16대 왕 인종은 이모하고 결혼한 꼴이며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기도 했다. 참 복잡한 가계다.
혼인 정책은 역사적으로 권력과 재산(영토)을 늘리고 안정화하기 위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썼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원제가 흉노의 선우 호한야에게 자신의 후궁 왕소군을 시집보냈고, 당 태종은 문성공주를 지금의 티베트 지방의 토번왕 송챈감뽀에게 시집보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화합책으로 혼인 정책을 펼쳐 무려 지방호족의 딸 29명을 부인으로 두었다.
서양에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1918년 1차 대전의 결과로 해체될 때까지 750년 가까이 왕가끼리의 혼인 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정치 안정, 왕권 세습, 영토 확장, 혈통 유지를 위해 근친결혼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상속으로 인한 영토 합병이라는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런 근친혼 정책은 영토와 권력의 안정을 얻었지만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합스부르크 왕가 자손의 초상화를 보면 유난히 얼굴 기형이 많다. 유럽 왕가와 얼기설기 얽히다 보니 4촌간 결혼은 다반사(茶飯事)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인 스페인의 카를 2세는 턱이 길고 뾰족하며 아랫입술은 비정상적으로 두껍다. 근친혼으로 인한 심각한 유전병으로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다.
이자겸이 2대에 걸친 왕실과의 혼인으로 권력을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이에 염증을 느낀 인종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낌새를 눈치챈 이자겸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자겸은 군사 실력자인 척준경을 앞세워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제압하고 정권을 더욱 틀어쥐고는 왕도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나중에는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될 것이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인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고자 반란을 일으킨다. 역사에 기록된 "이자겸의 난"이다.
그러나 인종이 이자겸의 부하인 척준경을 꾀어 그를 실각시키고 그의 처와 아들들을 법성포로 귀양 보냈다. 일설로는 척준경과 이자겸의 노비들이 사소한 일로 싸웠는데 시쳇말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 두 집안이 서로 척을 진 거다. 척 씨와 싸웠으니 원수 척질 수밖에. 척준경은 윤관의 여진 정벌 때 군공을 세운 인물로 단순 저돌 성격이 삼국지의 여포 같은 맹장이다. 인종은 두 사람의 불화를 이용하여 이이제이로 이자겸을 제거했다. 척준경도 나중에 탄핵당해 귀양가서 죽는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다.
정주(지금의 전남 영광)에서 귀양살이하던 이자겸은 이곳의 조기 맛에 감탄하여 해풍에 말린 조기에 정주굴비(靜州屈非)라는 글자를 써서 임금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자겸이 말린 조기에 굴비(屈非)라고 쓴 것은 자신이 비록 귀양 왔지만 굴하지 않겠(굴비屈非) 다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말린 조기를 두고 굴비라 불렀다고 한다. 굴비란 말의 유래다.
혹자는 이에 대해 이자겸이 굴비를 보낸 대상은 왕이 아니라 인종에게 시집보낸 두 딸이며 자신은 비록 귀양살이를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도 한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예나 지금이나 영광 굴비의 맛이 뛰어났음은 분명한 듯하다.
영광 앞바다 칠산에서 잡힌 조기를 가득 싣고 들어 오던 영광 법성포구 일출 모습(2022.김재석 촬영)